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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배나무의 붉은 열매

by 아침엽서

흰 이슬 백로와 찬이슬이 맺히는 한로가 지나고, 오늘(10.23)은 상강이다. 가을을 아직 맛도 못 보았는데 국화가 피고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절기는 계절을 한 발자국 앞선다.스쳐 지나가는 가을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 집 근처 배봉산 둘레길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엔 운동삼아 한 바퀴씩 자주 돌았는데, 텃밭을 가꾸면서부터 둘레길의 일부, 남쪽길만 지나다녔더랬다.봄이면 유록색으로 시작하여 짙푸름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그 청량한 아름다움에 취했던 배봉산이었다. 현기증 나던 여름을 건너뛰고 만난 산은 서서히 여름빛을 비껴 세우고 새 계절을 향해 가고 있었다.


봄산은 하얀 꽃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작은 꽃들이 모여 눈이 내린 듯, 소담스레 앞다투어 피어났었다. 이팝나무도 산딸나무도 하얗게 피어났고, 때죽나무도 산사나무도 하얀 꽃이 피었다. 네이버 렌즈는 하얀 꽃들의 디테일을 걸러내질 못해서 산사 나무라고 했다가 팥배 나무라고 했다가 오락가락했다.


오늘 드디어 나무이름표를 보고 나무의 정체를 알았다. 그것은 팥배나무였다.가을산은 붉은 열매가 단풍보다 먼저 가을색으로 왔다. 산수유, 산사나무와 가막살나무도 다 붉은 열매다. 그중 살짝 핑크빛이 도는 붉은색이 팥배나무였다. 이제라도 이름을 불러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팥(모양) 같은 배를 닮았다는 팥배나무는 어디가 배를 닮았는지 알 수 없다. 옛사람들은 말을 참 잘 지어낸다 싶다. 차라리 빨간 열매는 사과를 더 닮은 성싶은데 팥사과나무보다 팥배가 더 다정해 보였나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팥배나무는 작고 빨간 열매를 어마어마하게 이고 지고 있다. 하얀 꽃에서 저리 작고 예쁜 빨간 열매가 생겨나다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처절하다. 추위에 떨며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후에도 열매는 남아 씨앗을 퍼트려 줄 새들을 기다릴 것이다.


인간은 살아온 날들이 표정과 태도에 스며있어 마흔이 넘으면 그 모습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는데 저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하다. 과거의 모습을 짐작키 어려울 만큼 더 화려해지는 열매다. 나의 봄날은 어떤 꽃이었을지, 그리고 미래의 내겐 어떤 열매가 피어날지 문득 궁금해졌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미래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순간만이 나의 의지로 살아지는 것이다. 나의 열매는 오늘, 이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숲의 기운을 담은 바람과 부드러운 볕뉘를 받으며 이 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보는 가을날이다.


언제 찾아가도 반겨주는 나무들이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조용히 눈길로 속삭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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