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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 차리기 전쟁

by 소정
* 참고 : 본 브러치의 글들은 <표류사회 : 한국의 가족문화와 여성 인식의 변화사>(가제) 라는 이름으로 2021년 9월 말 경에 출간되기로 하였습니다.


흩어졌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쁘고 반가운 명절. 지옥 같은 교통 정체도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들뜬 발걸음을 막지 못한다. 한편, 명절 일주일 전부터 뉴스에서는 ‘4인 기준 제사 상차림 비용’이 나오고, 인터넷에선 명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토론장이 곳곳에서 열린다. 그렇게 명절이 되면 본격적인 제사상 전쟁이 시작된다. 각 집 냉동실에서 결국에는 썩어 갈 ‘모둠 전 종합 세트’를 상상하며 한숨과 함께 대형 팬을 꺼내는 며느리들, 퇴근 후 부랴부랴 애들을 챙기며 시댁에서 보낼 명절 준비로 머리가 아파지는 며느리들…. 한편, 늦는 며느리를 걱정하며 두 손 가득한 장바구니에 땀을 훔치는 시어머니들, 그리고 교통지옥 속을 운전하느라 피로에 짓눌린 아들과 사위들…. 명절을 맞이하여 힘들고 피곤한 모두의 최종 목표는 한곳으로 모인다.

바로 ‘제사 음식 만들기’이다.

반갑고자 모였지만 반복되는 일거리와 왠지 삐걱대는 괴리감, 나이를 먹어갈수록 명절이란 단어는 회피하고픈 조건반사를 만들어 간다. 도대체 명절이란 오로지 제사를 위해 생겨난 날일까? 왜 우리의 명절은 제사 음식과의 전쟁이 되어 버린 것일까?



| 성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대표적인 명절은 설날(음1.1), 정월 대보름(음1.15), 단오(음5.5), 추석(음8.15), 동지(음11월경) 등이다. 특히 설날은 매우 중요한 명절로 고려 시대에는 전후 7일씩 놀기도 했다. 조선의 사대부처럼 가묘를 모시지 않았던 과거에는 각 명절의 대표 음식 정도만 간단히 챙겨 돌아가신 부모님의 산소를 돌보며 가족끼리 잔치를 즐겼다.

제사를 다 함께 즐기던 유래는 꽤 오래됐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 등.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행사가 끝나면 왕부터 평민까지 밤새 어울려 놀며 대동(大同)의 장을 즐겼다. 게다가 한민족은 고조선 이전부터 유난히 효(孝)를 중시하던 예(禮)의 민족이었다. 더불어 인간 중심적이고 현실 중심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끼리 신바람 나게 노는 것을 좋아했다. 때문에 명절이 되면 의례히 명절 음식을 싸 들고 돌아가신 부모 산소에 모여 산소를 돌보며 명절을 즐겼다.(주자학 정착 이전까지는 대부분 부모님 제사만 모셨다) 오늘날 ‘성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성묘는 가묘(사당)를 중심으로 하는 『주자가례』식 제사가 널리 퍼지고 4대 봉사가 일반화되어 갔던 조선에서도 계속되었다. 본래 『주자가례』에는 명절 차례나 성묘라는 것이 없다. 『주자가례』에서는 명절이 되면 사당에 차나 술을 올리고, 큰 쟁반 하나에다 명절 음식을 올리면 된다고 쓰여 있을 뿐이다. 명절 음식이란 설날 떡국, 단오 쑥떡, 추석 송편, 동지 팥죽 같은 시절 음식[時食]을 말한다. 쟁반의 남는 자리에는 채소나 과일을 섞어 올린다. 그조차도 두 종류[二味]만 올리라고 당부한다. 예식도 매우 간단했다. 제사와 달리 술이나 차는 한 번만 올리고[單獻], 집안에 일이 있으면 아뢰고 재배한 뒤 마친다. 이처럼 시속 명절에는 제사를 올리지 않고 명절 음식을 천신례[薦新禮: 새로 나온 음식을 간단히 올리는 예식]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냈다. 때문에 『주자가례』의 명절 천신례는 「제사」 장이 아닌 「통례」(通禮: 일상에 통용되는 예) 장에 위치하고 있다. 그만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아주 간단한 예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간단한 의식이 다양한 이해관계로 변질되며 오늘날 같은 ‘번잡한 명절 차례(茶禮)’가 되었다.


차례 후 성묘 문제 역시 같은 맥락이다. 『주자가례』에는 삼월달에 산소(묘)에 올라가 간단한 제사[墓祭(묘제)]를 지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의 습성에도 관성이 있는 법. 명절마다 성묘를 해오다 『주자가례』식으로 가묘에서 차나 올리자니 영 허전했다. 그래서 명절날 『주자가례』를 따라야 할지, 풍속을 따라 성묘를 가야 할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다. 결국 전통적인 성묘와 『주자가례』식 제사를 중복해서 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번잡함을 조선의 지식인들은 줄곧 고민했다. 결국 성묘는 『주자가례』의 묘제 형식으로 대체되어 조선 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설날·추석 모두 집(가묘가 없음에도)에서 ‘차례’라는 이름의 거창한 제사를 지내고 제수를 챙겨 성묘를 간다.

정리하자면, 명절날 전 등을 쌓아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과, 차례 후 또다시 성묘하는 것은 우리 풍속과 『주자가례』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지금 같은 제사상은 기제사 등 정례 제사에만 사용한다.)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명절 제사 전쟁의 정체, 그것은 명절 차례와 정례(正禮) 제사를 구분하지 못한 ‘무지’와 ‘잘못된 기복 신앙’에 ‘가문의 과시욕’이 뒤섞인 해프닝일 뿐이다. 그나마 퇴계 종가 등 올바른 예법을 이해하고 실천해 온 몇몇 종가들은 지금까지도 간소한 명절 차례로 ‘가족의 화목’이라는 예의 본질을 지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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