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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Jun 30. 2021

7. 남녀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고대 여성들의 삶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책에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먼 옛날에도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이 달랐을까?이상적인 남성상이나 여성상은 대체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일단 질문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역사는 참 묘한 모습을 보여준다.아무리 절대적이었던 일도 언젠간 기억 속에 묻히고,묻혀진 것들은 예기치 못한 우연과 함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      



| 약재상에서 발견한 전설 속 나라

19세기 말, 한 청나라 관리였던 왕의영은 우연히 자신이 먹는 약재에서 이상한 부호를 발견했다. 당시의 농민들은 밭을 갈다가 청동기 유물이나 큰 뼛조각을 발견하면 청동기는 골동품 가게에 팔고, 뼛조각은 용골(龍骨)이란 이름으로 한약방에 팔곤 했다. 박학다식했던 왕의영은 용골에 새겨진 부호가 어떤 문자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는 즉시 북경 곳곳으로 사람을 보내 부호가 새겨진 용골을 전부 사들이게 했다. 그는 이 문자들을 연구하며 혹시 전설 속 나라인 상나라의 유물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그 부호는 한자의 기원으로 알려진 상나라의 갑골문이었다) 하지만 국자감 관료였던 그는 청나라가 무너지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연구도 그렇게 끝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란 놈 주변엔 늘 ‘기회’가 어슬렁거리는 모양이다. 다행히도 그의 발견은 여러 우연 속에 연구가 지속되어 마침내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중국 정부는 그의 갑골문 연구를 밑바탕 삼아 1928년부터 용골이 많이 나온 하남성 안양시 소둔 마을을 대대적으로 탐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땅 밑에서 엄청난 규모의 유적지를 발견해냈다. 얼마나 광대한지 발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다. 전설 속에만 존재하던 상나라(수도의 이름이 은이라 은나라라고 부르기도 함)는 그렇게 현실 역사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 왔다. 이 유적이 바로 200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상나라 유적지 ‘은허’이다.          


| 상나라와 우리 역사와의 관계

상나라는 지금으로부터 약 3,200년 전에 존재했던 대표적인 동이족의 나라이자 청동기 국가이다. 당시 유적 발굴을 총지휘한 중국 역사학계의 거장 부사년(傅斯年)은 상나라를 세운 민족이 고조선이 있던 ‘동북 지역’에서 건너왔다고 발표했다.(부사년(傅斯年, 1896~1950)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設』) 그리고 상나라가 망하자 상나라 왕족인 기자는 상나라의 유민들을 이끌고 고조선 땅으로 돌아갔는데, 후대에 이들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상나라는 현재까지도 우리 문화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달력이나 사주팔자를 볼 때 쓰이는 ‘갑자, 을축, 병인’ 등의 간지는 상나라 때부터 쓰던 것이고, ‘화수금목토’의 오행사상도 상나라 왕실의 지혜였다. 조선 시대 창경궁 옆에 종묘를 지었듯 궁궐 옆에 종묘를 짓는 것도 본래 상나라 문화였고, 우리말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한자 역시 상나라의 갑골문이 기원이다. 또 상나라의 새를 숭상하는 문화나 풍백 신앙 등은 중국보다 신라에서 더 중요시되었고, 무덤 양식이나 출토 유물 역시 오히려 우리 문화와의 공통점이 더 크다는 학설이 존재한다.

그런 상나라의 모습은 특히 고조선과 유사함이 많았을 것이다. 문화의 특성상 같은 시대 주변국들은 큰 틀 안에서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고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기자조선은 상나라 왕족과 뜻 있는 상나라 유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가 이어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은 땅에 매여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문화를 이어가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인가? 중국이 주장하듯 해당 국경 안의 역사는 모두 해당 국가의 역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문화의 주된 정체성이 어디로 이동하고, 어떻게 이어졌느냐가 더 중요한 것일까?      

    


| 상나라 최고의 장수 : 부호 이야기  

어느 시대나 화려한 전성기가 있다. 상나라에도 화려한 전성기를 연 위대한 왕이 있었다. 바로 22대 무정왕이었다. 41세에 즉위하여 자그마치 59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던 장수왕이었다. 또한 재위 기간 중 50여 개가 넘는 주변 부족국가들을 정복한 정복왕이기도 했다. 위대한 왕의 곁에는 위대한 인재가 있게 마련, 무정왕에게도 수많은 인재가 있었는데 왕이 가장 신임했던 것은 부호(婦好)와 부정(婦妌)이라는 인물이었다.

그중 부호는 힘든 전쟁마다 가장 선봉을 지킨 대단한 장수였다. 부호는 전쟁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개인 영지를 다스렸고 유사시에는 군사를 차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호의 언변과 기지는 외교와 정사에까지 미쳤다. 주변국에 사신으로 파견돼 외교를 하기도 했고, 또 왕을 대신해 지방 시찰 업무를 보러 떠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상나라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최고 제사장인 왕의 일이었다. 그런데 부호는 조상신, 자연신 등 다양한 제사를 주관하다가 후에는 하늘에 대한 제사까지 주관하는 상나라 최고의 제사장이 되었다. 그래서 훗날 부호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부호’라는 이름이 새겨진 각양각색의 청동 제기들이 무려 109점이나 발견되기도 했다. 아마 이 제기들은 부호만이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남녀가 함께 정치에 참여했던 상나라

이렇게 대단한 부호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부호는 바로 무정왕이 가장 사랑했던 그의 왕후였다.

비록 왕후였지만 그녀는 궁에만 묶여 있거나 주어진 일에만 얽매이지도 않았다. 부호는 능력이 되고 의지가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내었고, 또 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여성들도 관료가 됐고, 남성 관료들과 같은 자리에서 함께 일을 했다. 봉지를 받은 고급 여성들은 당연히 공납을 걷고 군사와 노역을 징집했으며, 정벌전에 나가거나 국경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고 보고하는 일까지 책임졌다. 정복국의 백성과 피정복국의 노예처럼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있었지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이를 낳고 농업을 책임지는 여성의 생산성을 신성시했다.      


중국 은허 부호묘 앞에 설치된 부호 동상

| 정치와 군사를 지휘하던 고대의 여성

혹자는 왕후였던 부호가 특수 케이스가 아니었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나라 여성 중 국가의 큰일을 담당한 것은 부호만이 아니었다.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산업농사짓기였는데, 농사는 나라의 목숨줄이었다. 그래서 흉년이 심한 해, 기우제 끝에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던 제사장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 분신할 정도였다. 특히 왕실 농지의 경작은 왕실의 힘을 좌지우지하는 중대한 일이었기에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왕실의 농경과 경제, 그리고 왕도 사방 100여 곳의 엄청난 규모의 농경을 책임진 것은 ‘부정(婦妌)’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금의 농림부, 기획재정부, 문화부 장관을 합한 정도의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봉지 주변에 전란이 생기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기도 했다.         

 

| 최고의 존칭어 : 여성  

이처럼 남녀의 역할 차이가 크지 않고 여성을 신성시하여 우대했던 상나라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후대와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 시대 고위 여성들에게 ‘마마님이나 마님’을 붙이는 것이 최고의 존칭이었듯, 당시에는 ‘부인 부(婦)’ 자가 최고의 존칭어였다. 더불어 신성함과 존엄함을 표시하고자 하는 대상에 ‘여자 여(女)’를 덧붙였다.

예를 들면, 당시 상나라 왕실의 성은 자(子)였는데, 상나라 왕녀인 부호가 왕후가 되면서 성에 여(女) 자를 덧붙여 ‘호’(好, 女+子=好)라 표기한 것 등이다. 그래서 성이 자(子)였던 부호는 존칭의 의미인 부(婦)와 신성의 의미인 여(女)를 덧붙여 ‘부호(婦好)’로 기록된 것이다. 즉, 부호를 조선 시대 식으로 번역하자면 ‘자성(子性) 마마’쯤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왕후인 부정 역시 정(井) 땅에서 왔기에 부정(婦妌)이라 했고, 임(壬) 땅에서 온 또 다른 왕실 여성은 ‘부임(婦妊)’이라 기록되었다. 후대에 시끄럽다[奻], 간사하다[姦], 노예[奴], 시샘하다[妎, 妬], 투기하다[妒], 방해하다[妨], 헐뜯다[姍] 등 온갖 안 좋은 개념에 여(女) 자를 붙이던 습관과는 정반대인 것이 재밌다.


상나라의 여성들이 이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상나라가 모계사회의 유풍이 남아 어머니의 권한이 강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는 같은 어머니의 아들인 형제에게 우선 세습됐고, 할머니에 대한 특별제사가 있었다.또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인 태양신을 ‘동모(東母)’라 하였는데, 대부분의 남성 중심 사회에서 태양신을 남성신으로 본 것과 대비된다. 이처럼 남녀 간에 차별이 잘 보이지 않고 평등으로 조화를 이루던 상나라는 막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주변의 수많은 동이 부족국가들을 병합해 554년간 나라를 유지했고, 상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그 문화는 중국 한족과 특히 우리 한민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나라의 가장 큰 저력, 그것은 바로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온전히 펼 수 있게 해준 문화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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