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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Apr 05. 2021

상대방을 다독이고 싶게 만드는 냄새

파스, 그 시원한 멘솔향의 힘

4월 3일 우중충한 토요일 아침.

새벽부터 쏟아지는 비에 외출하기는 글렀고,   동안 미처 버리지 못한 쓰레기 봉투나 내다버리자 싶어 양손 가득 쓰레기 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더랬다. 아직 이른 주말 아침,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시간이라 한방에 1층까지 내려갈  알았는데, 역시.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쭈뼛쭈뼛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반팔 위로 파란 용역조끼를 입고 캡을 눌러  까만 피부의 아저씨가 비에 젖은 대차 손잡이를 잡은  등장했다.


다른 모든 착장보다도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금색 체인 목걸이와, 상처투성이 팔뚝이었다. 어두운 날씨와 습기 가득찬 공기 속에 그런 아저씨를 마주하니 솔직히 나도 모르게 약간 긴장이 됐다.


일부러 스텝을 두어 걸음 뒤로  아저씨가 대차와 함께 올라탈  있게 공간을 만들었다.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나는 아저씨에게서 습한  냄새나  냄새가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순간 아저씨에게서 시원한 멘솔 향이 났다. , 쿨파스 냄새다. 요즘 흔하게 쓰는 얇은 플라스타 파스의 냄새가 아니었다. 습포에 멘솔, 캄파가 가득한, 카타플라스마 쿨파스의 냄새였다. 어릴  할머니가 가끔 주시던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생긴 박하사탕 냄새처럼 뭔가 달달하면서도 차가운 , 코뿐만 아니라 뭔가  뒷덜미에서 후각이 감지 같은, 그런 향이었다. 붙일  느껴지는  축축함과 차가움에  어울리는 그런 .


콧구멍으로 빠르게 들어온 파스의 멘솔 향은 내 의식보다 빠르게 감성을 먼저 건드렸다. 화아-한 파스 냄새를 느끼는 순간 “아저씨, 많이 피곤하시죠.” 라고 얘기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마무시한 오지랖이지만, 그러고 싶을 정도로 파스의 냄새가 내 마음을 건드렸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어깨가 자주 아프셨고 부항과 파스를 늘 달고 지내셨다. 엄마에게서 파스 냄새가 나면 오늘도 엄마가 고된 하루를 보냈구나, 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다 큰 지금도 가끔 친정에 가면 엄마 아빠에게서 일본 동전파스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엄마아빠 또 무리하셨구나 싶어 마음이 안 좋다. 할머니도 어린 시절 맨소래담과 안티푸라민, 호랑이 연고를 좋아하셔서, 막둥이를 돌봐 주시다가 다리가 욱신거리면 맨소래담을 치덕치덕 바르시곤 하셨는데, 그 옆에서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어렴풋이 할머니의 고생을 실감했던 것 같다.


고3 때는 내가 파스를 붙이고 살았다. 일자목이 안 그래도 심한데, 공부를 하루종일 하려니 목과 허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모의고사 날이 되면 파스를 뗄 수밖에 없었는데, 파스 냄새가 너무 강해서 다른 친구들의 시험에 방해가 될까봐서였다. 시험이 끝나면 통증이 밀려와서 근처 한의원으로 침을 맞으러 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여담인데, 한번은 간호사분이 제대로 못 봐 주셔서 침 하나를 목에 달랑달랑 달고 병원 문을 나선 적도 있었더랬다)


고등학교 때 동경했던 여자 선배가 있었다. 육상선수였는데, 짧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운동장의 흙을 튕겨내며 뛰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다. (여고생들에겐 흔한 일이다. 오해 없기를) 나는 수업이 모두 끝난 시간이면 종종 언니의 교실로 몰래 들어가 언니의 사물함에 손편지와 음료수를 넣어두곤 했다. 언니의 사물함에 그렇게 선물을 갖다 놓을 때마다 사물함에서 에어파스 냄새가 났다. 그럴때면 언니가 몸을 혹사시키며 운동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때 약을 잘 알았으면 칼슘 마그네슘과 아르기닌 제제 등을 선물했겠지만.. 그 때는 그냥 언니가 좋아한다는, 곰돌이 푸우가 그려진 꿀물만 그렇게 넣어 놓곤 했다)


사회 초년생일 때, 운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한동안 만난 적이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데이트를 할 때 가끔 진한 우드향 향수 냄새 아래로 알싸한 파스 냄새가 느껴졌다. 그 파스 냄새가 늘 그렇게 안쓰럽고 또 향긋하고 그랬다.


기타를 치던 사람의 손목 위에도 오래된 손목시계 스트랩 냄새와 담배냄새와 파스냄새가 뒤엉켜 있었고, 식당 홀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불판을 빼면서도, 손님한테 파스 냄새 풍기면 안된다고 하루종일 통증을 참다가 밤이 되어 일이 끝나고 나서야 파스를 붙이던 사람의 등 뒤에서도 파스 냄새가 애잔하게 나곤 했다. (애석하게도 지금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남편은 정작.... 아무리 아파도 파스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파스에 대한 기억 덮어쓰기가 불가능했다.)


꼭 그런 기억들 때문만은 아닐 텐데, 내게 파스 냄새는 뭔가 상대방을 애틋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통증의학과에서 처방전을 가지고 내려오는 어르신들에게서도 강한 파스 냄새가 날 때가 있는데, 강한 냄새에 자극을 느끼기 보다는 “많이 아프시죠...?”하고 걱정하는 오지랖을 부리고 싶게 만든다. 무의식적으로 내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무언가가 있는가보다. 내게 파스 냄새는 상대방을 다독이고 싶게 만드는 그런 향인 것이다. 누군가 나와의 약속에 30분 늦었더라도, 그가 파스 냄새를 풍기면서 나타난다면 나는 아마 이유불문하고 화를 풀어버릴 것 같다, 아마도.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타려는데 1층에서 아저씨가 다시 황급히 대차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라탔다.

아저씨가 움직이며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파스 냄새가 또 훅 올라왔다. 아저씨, 오늘은 일 끝나시고 따끈한 식사 하시고 좀 쉬시면 좋겠어요. 중간 층에서 또 대차를 끌고 내리는 아저씨를 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중얼, 오지랖을 부려보았다.



*요즘은 그런 멘톨이나 캄파와 같은 성분이 들어간 파스 대신 진통소염제 성분만 딱 들어간 제제가 많아, 예전 파스들처럼 냄새가 강하지는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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