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터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 자리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외모로 보면 대학생이라고 해도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그런 배짱은 없었다. 조용히 고시원 주변을 산책 삼아 돌아보았다. 사람을 구하는 곳은 술집 아니면 식당뿐이었다. 그곳에서 미성년자를 받아줄까? 만약 안 된다고 하면 미성년자임을 속여야 할 텐데, 내 주변머리로 할 수 있을까? 하루만 생각해 보자 하고 돌아오는데 어제 갔던 편의점에 ‘알바 구함’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고민할 것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 아래에서 중년의 남자가 담배를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알바 구한다고 적혀 있어서 왔습니다.”
키가 조그만 아저씨가 계산대 안에서 기듯이 나오며 말했다.
“아, 그래요? 일해본 적은 있어요?”
“아니요, 편의점은 처음입니다.”
“다른 데서는 좀 해봤나 보네, 키도 크고 인물도 좋네. 몇 살이지?”
“고3입니다.”
“고3이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있어요?”
“학교 안 다녀서 괜찮습니다.”
“가출할 얼굴은 아닌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미성년자니까. 나도 알 건 알아야지.”
“부모님이 상황이 안되셔서요.”
“아, 학생 가장이구나. 미안해요. 괜찮아, 괜찮아. 다 지나간다고. 그래도 우리 때보단 낫지 뭐.”
우진은 피식 웃음이 났다. 친근해 보이는 분이다.
“성격 좋아 보이네. 합격! 당장 내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해야하는데 괜찮겠어요?”
“네, 좋습니다.”
사장은 문 앞으로 가서 알바 구함 종이를 떼어 버렸다. 간단한 설명을 듣고 근로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우진은 저녁 네 시간이라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막막하지만, 하나씩 하면 되겠지. 희한하게도 어제 그렇게 아팠던 곳은 언제 부었었냐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날 오전, 우진은 고시원에서 가까운 헬스장을 찾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건지, 오픈 전 청소를 할 테니 공짜로 한 시간만 운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장님께 부탁했다. 마침 직원이 필요했던 사장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급여를 원하는 것도 아닌 데다가 비주얼도 훈훈하고 넉살마저 좋은 친구다. 제시간에 오픈하고 청소만 하면, 운동은 언제든지 와서 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비바람 속에서 출항했는데 생각보다 순항 중이다. 편의점 알바로 대략 백만 원 정도의 수입이 생기니 고시원비 삼십만 원을 내고도 식비, 핸드폰 요금 등은 해결될 것이다. 게다가, 운동도 공짜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자퇴를 해버렸으니, 수능 응시를 하려면 최대한 빨리 검정고시부터 통과해야 했다. 엄마의 의도가 아닌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싶어 우습기만 하다. 늘 수동적이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가라는 대로, 한 번도 제 의지로 집 밖을 나선 적이 없었다. 집에서 쓰던 노트북을 챙겨 나오길 잘했다 싶다. 우진은 검정고시 일정과 자기의 계획을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하루는 금방 흘러 오후 다섯 시가 지나버렸다. 토스트 한 장과 삶은 달걀 하나를 먹고 고시원을 나섰다. 6시부터 시작이지만 첫날이니까 조금 일찍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10시에 퇴근하고 와서 바로 자면 다음 날 아침 6시에 헬스장 문 여는 건 어렵지 않겠지. 조심스레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여자 직원이 앉은 채로 뭔가 분주하게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오늘 6시부터 새로 일하게 된 알바,”
“아, 거기 조끼 입고 여기로 와요.”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우진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계산대에 놓인 조끼를 후다닥 입고 그녀 옆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이거 저기다가 갖다, 어머나!”
그녀는 진짜 깜짝 놀란 듯했다.
“안녕하세요. 6시부터 10시까지 일하게 된 전우진입니다.”
“아, 아이고, 깜짝 놀랐네. 우리 구면이죠? 반가워요. 저는 김미경이예요.”
‘김미경. 엄마 이름이랑 같네, 하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기요??”
“아, 죄송해요. 뭐부터 하면 되나요?”
“지금 엄청 바빠요. 다른 생각 할 틈이 없다고요. 방금 물류 들어와서 이거 진열부터 해야 해요. 곧 손님들 들이닥칠 거거든요. 여기 이 시간에 사람 많아요.”
우진은 미경이 시키는 대로 하나하나 일을 배워나갔다. 같이 일하던 직원이 갑자기 그만둬버려서 혼자 난감했다고 한다. 이렇게 빨리 새로 일할 사람이 와서 너무 다행이라며 바코드 찍는 법, 물건 받는 법, 교대 전후 시재 하는 법, 청소하는 법, 미성년자 판매 조심해야 할 물건 등등까지 그녀는 알아듣기 쉽고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꼭, 선생님 같아요.”
“어? 어떻게 알았죠? 저 여기 교육학과 다녀요. 티가 나나 봐요.”
“어쩐지, 좋은 선생님 되실 거 같네요.”
“고마워요.”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 때문에 대화는 중단되었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잠시 숨 돌릴 시간이 찾아왔다. 미경은 우진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넸다.
“이거 폐기해야 하는 거라, 원래는 버려야 하는데, 나는 먹어요. 아깝잖아요. 사장님한테 말씀드리고 먹는 거니까 눈치 안 봐도 돼요. 단, 3시간 안에 마셔야 해요. 배탈 나도 나는 몰라요.”
“하하, 네, 3초 안에 마시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름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네요. 몇 살이에요?”
“고3요. 학교는 안 다녀요. 어느 학교인지 물어볼까 봐 ”
“노코멘트하시겠다. 더 이상 묻지 말라 이거네요. 그러죠, 뭐. 나는 대학교 2학년이니까 두 살 누나네. 말 놓는다? 괜찮지?”
“하하, 네, 그러세요.”
“너도 편하게 해. 나는 큰 이슈가 없는 한 이 시간에 계속 일해야 할 거 같으니까. 우리 오래 볼 거 같은데 편하게 지내자고.”
“천천히 할게요.”
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우진에게 결핍되어 있던 공간에 살짝 빛이 드는 거 같았다. 이성으로의 감정은 아니었다. 우진은 그저 상냥한 관심이 필요했을 뿐이다. 엄마 김미경은 그 자리를 메워주지 못했는데, 누나 김미경에겐 따스함을 기대해도 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첫날이지만, 예전부터 알아 온 사람 같은 친밀감이 느껴졌다. 엄마랑 이름이 같아서일까? 우진은 머리를 흔들며 엄마 생각을 지워냈다.
“누나, 조심해서 들어가요. 저는 여기 근처라.”
“그래. 고생했어. 내일 보자.”
첫 아르바이트 치고는 할 만했다. 내일 아침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굳이 새벽 오픈 청소를 맡겠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학교 다닐 때처럼 꽉 짜인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싶었다.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한 끝에 나온 생각이었다. 안 받아주면 받아줄 때까지 사정해 볼 생각이었는데 얼굴 덕을 본 건가 싶기도 했다. 버려진 유전자가 사는 데 도움이 될 줄이야. 어쩌면, 이 친구 덕분인지도 모른다. 오른쪽 팔목을 왼손으로 톡톡 치면서 우진은 폐기로 나온 삼각김밥 하나를 한입에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