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꼬야의 언어 #2
작년 겨울에 꼬야가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내 주먹만 한 투명 돼지 저금통을 한동안 별생각 없이 TV 앞에 두었다. 아이가 한창 고집이 세지고 떼를 써서 색다른 동기부여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네 살의 어느 날, 남편과 나는 칭찬 도장 찍기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하루 종일 다른 사람(엄마나 아빠, 시터 / 어린이집에선 본인도 사회생활을 하느라 친구를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을 때리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아 밥을 잘 먹고, 자기 전 이를 잘 닦고 오는 등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냈을 때만 자기 직전에 칭찬 도장을 하나씩 찍어주기로 했다. 어른, 아니 머리가 조금 큰 초등학생만 되었어도 "그래서 그거 다 찍으면 뭐해줄 건데?"라며 추후 보상에 대해 거래를 하려 들텐데 아이는 도장을 다 찍으면 하고 싶은 일로, "초코 우유 먹을래." "엄마랑 어린이집 같이 가고 싶어” 등 소박한 소망을 이야기했다.
스무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칭찬 도장을 찍는 데 처음에는 두 어달이나 걸렸지만 언젠가부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한 바닥이 도장으로 가득 찼다. 내가 출근을 한 지 반년쯤 지났을 때, 그러니까 아이도 시터 선생님과의 생활이 많이 편안해졌을 즈음부터였다.
"자, 오늘도 우리 꼬야 하루 잘 보냈지? 밥도 잘 먹고, 선생님하고도 어린이집에서도 재미있게 잘 지내고, 치카도 했으니까... 도장 찍자!" 하고 칭찬 도장판을 보니 자리가 없었다. 그때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조그마한 저금통이 눈에 띄었다.
"그럼 오늘부터는 이 저금통에 동전 넣는 걸로 할까? 꼬야가 하루를 잘 보내면 자기 전에 엄마가 동전을 줄테니까 꼬야가 동전을 넣는 거야. 동전을 많이 넣어서 돼지 저금통이 무거워지면 우리 같이 그 돈으로 꼬야 먹고 싶은 거 사러 가자."
마트에 가서 직접 동전을 내고 원하는 걸 사면 된다고 말해주었더니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다섯 살이 될 즈음 꼬야는 굉장히 많이 안정되었고 대부분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서 전처럼 크게 떼를 쓰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 조그만 돼지도 동전을 하나둘씩 먹더니 어느새 살이 올라 꽤 묵직해졌다.
"꼬야야, 이제 돼지가 동전 너무 많이 먹어서 넣을 자리가 거의 없네. 들기도 힘들어. 봐봐."
돼지 저금통에 담긴 건 평범한 동전이 아니었다. 아이가 스스로 얻어 낸 칭찬과 성취였다. 황금돼지 보다 소중한 칭찬 돼지를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자랑스럽고 흥분된 표정으로 아이가 말했다.
"엄마, 돼지가 돈 엄청 많이 먹어서 엄청 많이 뚱뚱해지면, 내가 엄마 햄부톤 사줄까?"
(모든 발음이 거의 어른처럼 정확한데 핸드폰만큼은 아직도 그렇게 발음한다)
"엄마 핸드폰?"
작년 겨울 내 생일에 남편이 핸드폰을 바꾸라고 했는데, 나는 4년 가까이 사용하긴 했지만 아직 망가지지 않은 아이폰 8플러스를 그냥 버리는 게 왠지 죄스럽고, 최장 핸드폰 사용 기한인데 그 기록을 좀 더 연장해보고 싶기도 하고, 최근 나온 아이폰 신형이 마음에 쏙 들지도 않은 터라, 그냥 선물을 받지 않고 넘어갔다. 아이는 우리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응. 내가 엄마 햄부톤 사줄게. 뒤에 엄청 반짝반짝 보석도 박혀 있고 예~쁜 스티커도 많이 붙어 있는 그런 햄부톤, 내가 사줄까?"
'아, 그러니까... 시크릿 쥬쥬 핸드폰 같은... 그런 거?'
자신을 위한 소원은 내 예상보다 훨씬 작은 것이었는데, 나를 위한 소원은 생각보다 훨씬 큰 것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물론 모두 속세에 물든 어른 기준에서였다. 다섯 살 아이가 아직 순수할 수 있는 건, 그래서 마냥 예쁘고 귀여울 수 있는 건, 경제관념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걔 축의금 십만 원 했는데 어떻게 결혼식도 안 오냐"
"걔는 어떻게 그렇게 밥 한 번을 안 사? 맨날 그렇게 많이 얻어먹고는"
"솔직히 매번 아부지 병원 모시고 다닌 건 난데 재산은 똑같이 나눈다고?"
어른이 되면 돈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도 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얼마를 했는데 상대는 그만큼 하지 않았을 때 서운한, 치사하지만 참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도 다 경제관념 때문이다.
"엄마! 돼지가 돈 많이 먹어서 뚱뚱해지면, 내가 그 돈으로 엄마 햄부톤 사줄게. 보석 엄청 많이 달리고 스티커도 붙어 있는 아름다운 핸부톤. 그리고 엄마 예~쁜 목걸이도 사줄 거야. 그리고 아빠는 왕관 사줄 거야. 엄청 멋있는 황금옷이랑."
"그럼 꼬야 거는 뭐 사고 싶어?"
"나는 피자 사서 엄마 아빠랑 셋이 나눠 먹고 싶어. 우리 피자 두 판 시킬까? 두 개면 돼? 아빠 무슨 맛 먹고 싶어?"
"아빠는... 마르게리타. 꼬야는?"
"엄마! 엄마는 뭐 먹을 거야?"
"엄마는 꼬야가 그림 보고 고르는 피자 같이 먹을래. 꼬야가 골라봐."
"그래? 그럼 우리... 피자 그림 한번 그려볼까?"
피자 전단지나 인터넷에 나오는 메뉴 사진을 보고 아이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말이었는데, 아이는 어쨌거나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가지러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