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하루, 두 시간 데이트는 주로 그의 학원 앞에서 시작되어 그의 집 앞에서 끝난다. 피곤해서 운전대를 넘기고 조수석에 앉아 오늘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술 작품과 심리학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상대적 박탈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루소가 피카소 앞에서 보여준 태도가 기억에 남았다고.
"비전공자인 루소가 당시에도 어마어마하게 유명했던 피카소 앞에서 이 시대에 천재가 둘 있다. 당신과 나.라고 말한 점이 정말 유쾌하고 긍정적이라서.
인상적이었어."
"음 그러네"
"물론 세관원으로 일했던 젊은 시절부터 40대에 앙데팡당 같은 데에 출품할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으니까 나오는 자신감이기도 하겠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 비평가들이 눈 감고 발로 그린 그림 같다고도 했대. 그런데도 계속 그림을 그려나간 정신력, 멘털. 멋졌어"
운전대를 꺾으며 남자 친구는 말했다.
"사람의 인성을 어디서 알 수 있게?"
"글쎄"
"최악의 상황에서 본성이 나오는 거야. 몇 억 빚을 지게 됐을 때.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불치병에 걸렸을 때."
그래.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접속사를 만든 사람은 대단한 낙관성의 소유자가 분명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커다란 카페에 들어선다. 보통은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만 오늘은 둘 다 식욕이 없다. 레모네이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청포도 타르트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한 주간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오늘은 얼마만큼 솔직할 것인가. 늘 우울한 이야기만 줄지어 놓다가 소리를 지른 전과도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또 어땠어"
'어떻긴 - 아주 X 같은데.'
배시시 웃으면서 바빴어, 해도 그 동그란 눈이 쉽게 날 놔주지 않길래. 털어놓아 보았다.
아침, 눈을 뜨기도 전에,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과 또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게 너무 끔찍하다고.
(음, 음)
웃으면서, 아무 일도 없는 척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하고 맡겨진 일을 해내야 하는 이유를, 그래, 삶의 목적을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음, 음)
모든 것이 헛되다. 는 말, 진리인 거 알겠다. 그런데 그 무의미한 들숨과 날숨의 총합을 왜 오륙십 년은 더 살아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막무가내로 말을 쏟아낸 식탁 위에는 정적만 흐른다. 레모네이드의 달그락,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또 쓸데없는 말을 했을 뿐이다.
"음."
가벼운 묵음으로 삼켜지던 것이, 끝내 발음된다. 그리고 두 어 번 끄덕이는 고갯짓. 두툼한 검지는 핸드폰 화면을 넘긴다. 이 와중에 딴짓이야? 심기가 불편해지려는 찰나, 테이블 위로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거 봤어?"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며 받아 든 화면에는 홍콩 아파트 내부를 찍은 사진이 줄지어 있다. 5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 네 식구가 옹기종기 살아가는가 하면. 몸을 누이면 팔 뻗을 공간도 마땅치 않은 방도 월 2~30만 원을 내야 구할 수 있다. 보통 우리네 원룸과 비슷한 크기의 오피스텔은, 무려 11억 원에 거래된다. 그래서 맥도널드 난민이 늘어난단다. 빨간 에나멜 소파에 웅크려 잠을 청하는 노파의 옆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적나라한 현실이 거울같다.
매일 죽을 것 같아,를 반복하는 나는 진짜 절망이 뭔지나 알고 찡찡대는 걸까.
"나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주먹을 불끈 쥐고 팔뚝을 퍽퍽 때려본다.
내 손만 아프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나 왜 이것밖에 안되지, 이만큼밖에 못하지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매일 같은 곳, 같은 시간, 같은 문제집을 풀고 외우며 공부하는 그에게 내일의 긍정은 뭘까. 50일 앞으로 다가온 시험을 준비하면서 1년 내내 매일 5시 반에 기상하는 원동력을 나는 상상할 수도 없다. 멋진 선생님이 되는 것? 그냥 이 공부가 끝나는 것? 그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에는 의외의 풍경이 있다.
"나중에 이런 거 하고 싶다."
2년 차 고시생인 남자 친구는 손등으로 1층과 2층을 설명하면서 스포츠 펍을 말한다.
"1층에는 다트 기계, 농구 골대를 놓고 2층에는 테이블이 있는 거야. 메뉴는 딱 세 개야. 엄청 다양한 종류의 맥주, 정말 맵고 짠 피자, 감자튀김"
"완전 구체적이다"
"그치. 나중에 진짜 하면 좋겠다."
소파에 등을 기댄 그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무언가를 꿈꾼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실현 유무와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니.
그 환상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우리를 이끌어 내고야 마는 것을 종종 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인 것이다.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은 생각이고 생각을 지속하는 원동력은 기대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희망이 갖는 놀라운 힘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정작 그 원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애석했다.
다시 마음을 고쳐 먹어 보자.
무턱대고 할 수 있어, 잘될 거야 하는 것은 숨이 턱 막히는데.. 그래, 어쩌면.이라고 웃는 정도부터 해볼까.
벌써 코트를 찾고 싶어 지는 시월의 밤.
연휴 다음날을 준비하는 마음에 딱 하루만큼의 긍정을 보낸다. 차고 넘치는 할 일에 속 썩기보다 여전히 예쁠 내일의 하늘을 기대하는 마음을 깔고 눕자.
혹시 계획대로 안되면 어쩌지 노심초사하는 걱정 위에 그래도 결국엔 어찌어찌 다 되더라는 편안함을 덮고, 잘 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