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기 전에는, 내가 엄마가 되어 보기 전에는 나에게 엄마는 낳아준 사람과 의식주를 책임져 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에 불과했다.
엄마가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밥은 굶어본 적이 없다. 밥 주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울어도 상황에 맞춰야 했다. 엄마가 일이 끝나면, 주변에서 밥 주라고 허락하면, 어른들이 식사하고 계시면 엄마는 나에게 젖을 물렸다. 나는 맨 마지막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 다음이 엄마였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나도 엄마가 되었을 때 엄마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넌 고집이 장난이 아니었어~"
"고집?"
"응~ 너그 할머니가 하도 나를 힘들게 하는데 화풀이할 때가 없더라. 근데 밥 달라고 칭얼 대기에 그냥 때렸어. 나도 모르게~ 얼마나 때렸을까? 도망가고 울기를 바랐는데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그대로 다 맞고 있더라. 눈으로는 왜 때리냐고 원망하는 듯했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
"그랬어? 그때 나는 몇 살이었어?"
"몰라~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을 걸~"
나는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왜 때리지 말라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그 아이는 아마 너무 무서워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을 거야. 소리칠 힘도 없었을 거야.
사람은 스트레스 상황이나 불안이 엄습하면 어떤 사람은 도망치고, 어떤 사람은 맞서 싸우고 어떤 사람은 생각을 하고 울면서도 할 말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는 맨 마지막이다.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낄 때는 제 기능을 다 하는 뇌가 정지되어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공포와 두려움에 포위 당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곤 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원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상황이 주어진 그대로를 수용하면서.... 하지만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억울함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때리는 엄마에 대한 분노로 많이 울었을 것이고 아팠을 것이다. 고집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어른이 된 나는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끙끙 앓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안전감과 편안함이 회복되면 그때야 비로소 나는 대처 방안을 생각하고 수습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다가 전쟁이 끝나면 너덜너덜 해진 몸으로 폐해가 된 상황을 수습하고 재건하는 병사처럼.... 그때 형성된 나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 패턴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시절을 함께 견디었던 초등학교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고 하더라~그때 그 친구는 말했다.
"야~ 너는 그래도 밥은 제대로 먹었네. 나는 밥 먹는 그 순간도 긴장했어. 우리 아버지는 기분이 상하면 상을 엎어버리거든. 참 우리 아버지 기분이 금방도 변한다. 기분 좋게 앉았다가 뭔가 조금만 기분 나쁘면 밥상을 엎어버렸어. 그래서 난 지금도 밥을 안 씹고 그냥 삼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변하지 않더라."
"웃프다. 웃긴데 슬프다."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왔구나. 그래서 지금도 살아내기 위해 난 가만히 있다가 수습하는 걸로, 그리고 그 친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한 자리에 오래 있기를 불편해하고 중심에 있기보다는 늘 맨 끝자리가 편안하다고 했었구나. 친구는 한순간도 그냥 있지를 못한다. 밥도 빨리, 술도 빨리, 일도 빨리 그리고 모임도 하루에 2개 이상.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구나.
우리의 부모님들은 왜 그랬을까? 분명한 것은 그 행동이 그 순간에 당신들을 지키기 위한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지키기 위한 최선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행동패턴은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대처 방법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변화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 상처받은 내면아이로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건강한 엄마들은 어떻게 할까?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배고파서 우는지, 무서워서 우는지, 찝찝해서 우는지, 힘들어서 우는지를 알아차리고 적절한 돌봄을 해준다.
그럴 때 아이들은 '아~ 이것을 무섭다고 하는구나, 무서울 때는 안아달라고 하면 되는구나, 아 ~이것은 배고파서 우는 것이었구나 그리고 배고프다고 울 때는 엄마가 밥을 주는구나, ' 하고 자기만의 인생 사용 설명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의식주를 안전하게 책임지는 엄마는 있었지만 정서를 알아주고 해결해 주는 엄마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서를 해결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불안이나 두려움 외로움 억울함 슬픔 등 고통스러운 감정을 해결할 줄 몰라 나는 그런 감정이 찾아오면 꼼짝할 수가 없었고 친구는 도망치는 것으로 자신을 지켜낸 것이다.
내 감정이 내 욕구가 내가 보내는 신호가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데 나는 안정감이 부족해서 늘 불안했고 불안할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불안한 것이 싫어서 익숙한 것만 하려고 하고 갈등 상황이나 낯선 상황 불안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려 교 했던 것이다.
엄마가 없으면 내가 엄마가 되어줘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는 나보다 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경험해보지 못하면 주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감정을 살핀다. '슬프구나 ~슬프다는 것은 내 욕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구나. 슬플 때는 이렇게 해주면 되는구나. 억울하구나~ 이래서 억울했구나 억울할 때는 이렇게 해결하면 되는구나'라는 나만의 사용 설명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더불어 내 아이는 나와는 조금 달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하지 않은 마음의 소리까지 들으려 집중하며 살고 있다.
마음을 보듬어 줍니다.
나무야(나무는 애칭입니다.)
너에게 집중하고 너의 감정을 살펴주고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엄마가 없어서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알아가느라 힘들었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너만의 방법을 찾아
건강한 엄마 건강한 어른이 되려고 노력해 줘서 고마워.
그 노력 덕분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불안하고 상처받을까 봐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
내가 너의 감정을 알아주고 너에게 가장 좋은 해결방법을 찾아줄게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줄게.
너의 곁엔 항상 내가 있어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고 반응해 주는 엄마의 돌봄 즉 정서적인 돌봄이 있을 때 우리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껴야 우리는 마음껏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나무님들은 낯선 상황, 갈등상황에서 어떻게 하시나요? 저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거나 이불킥 하시나요? 아니면 화를 내시며 더 빨리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시나요? 아니면 그냥 자포자기하고 도망치시나요? 그것도 아니면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시나요?
어떤 방법이든 그 방법은 어린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거예요. 다만 그 방법이 현재의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바꿔 보기로 해요.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 그 아이 마음을 공감해 주는 것, 그리고 함께 최선을 방법을 찾자고 말해주는 것부터 시작일 거예요. 엄마가 하늘에 있어도, 멀리 있어도, 약해졌어도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나의 엄마가 되면 항상 나와 함께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