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름을 불러주세요
예전에 이런 수수께끼가 있었어요.
“분명 내 것이지만, 나보다 남이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쉽게 맞히셨습니까? 정답은 바로 ‘이름’입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나이와 관계없이 서로 이름을 부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들면 방금 드린 수수께끼와는 달리, 남도 내 이름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든 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걸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서, 이름 대신 호(號)로 불렀을 정도잖아요. 특히 여성은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혼 후 바로 '아무개 엄마'로 불리다가, 손주가 생기면 '아무개 할머니'로 불리곤 했습니다. 본인도 자기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밝히는 대신 "아무개 엄마예요"라고 하거나 "아무개 할머니예요" 이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외국에서도 이름 대신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하면 서로를 이름보다 ‘허니(honey)’, ‘달링(darling)’이라고 부르지요. 그건 그 어떤 누구도 그렇게 부를 수 없는 둘 만의 애칭이라서, 서로를 더 친밀하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여보’, ‘당신’하고 부르듯이 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남이 나를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허니(honey)’나 ‘달링(darling)’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그러니 이런 부부간의 호칭이 아니고서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서로 각자의 이름으로 부르고 불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나 자신을 자각하게 됩니다. 실제 어떤 분이 평생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뭘 배우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는 강사와 수강생 모두 서로를 ‘아무개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기보다 젊은 강사의 입에서 처음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는 무척 낯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나 자신을 되찾은 느낌이 들어서 참 좋다고 하셨어요.
시인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고 했지요. 이름이 이렇게 참 중요합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세상에 널린 보통명사이던 것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는 고유명사, 그것도 내 마음에 아주 아름다운 고유명사가 되니까요.
그래서 우리 모두 나이 들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많이 불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외국의 시니어들은 젊은 사람과 사회관계를 맺을 때, 먼저 그냥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한다고 합니다. ‘아무개 엄마’, ‘아무개 할머니’도 좋고, ‘아무개 부인’식의 호칭도 좋지만. 그 ‘아무개와의 관계'가 아니어도, 나 자신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당당하게 생활하면서 인정받으면 더 좋겠어요. 그러니 그 '아무개'와의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된 분들과 통성명을 하게 될 때도, 그냥 '아무개 엄마', '아무개 할머니', '아무개 부인'으로 그칠 게 아니라 '아무개 엄마인 누구', '아무개 할머니인 누구', '아무개 부인인 누구'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데 익숙해지시면 좋겠어요. 그래야 살면서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로부터 윗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게 터부시되는 우리 문화에서는, 윗사람과 인간관계를 맺는 데 경직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모임에서도 “선생님”이나 “선배님”하고 부르다 보면, 선생님이나 선배 대접을 꼭 해야만 하고 받아야만 할 것 같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 문화에서는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모임이 말처럼 활성화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대가 함께 하는 모임이 활발해지려면, 윗세대가 먼저 ‘선생님’이나 ‘선배님’으로서 대접받으려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모임에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사회자가 '야자타임'을 제안하기도 할까요.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게 어색해서 퇴직한 지 오래됐어도 직장에 다니던 시절의 직함을, 그것도 가장 좋았던 직함을 붙여서 부르기도 합니다. 그게 그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러는 게 더 어색한 일 아닌가요? 지금은 분명 그 직함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앞에 '전(前)'자를 붙여서 불러야 바른 호칭이 되잖아요. 비록 사회통념상 그런다고 해도, 그냥 예전 직함을 그대로 불러주길 원하는 건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어쩌면 차라리 대접받는 호칭을 내려놓는 게, 나이 들어도 젊게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업체 직원들이 고객에게 친근한 인상을 주기 위해 50+인 고객에게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던데, 어색해하는 분들도 많다고 해요. 제 선배는 미혼인데 휴대폰 바꾸러 갔다가 '어머님'이란 호칭을 듣고 기절할 뻔했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고객의 본질을 나타내는 호칭, '고객님'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이름은 나의 본질입니다. 나이 들수록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젊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무개님'이나 '아무개 회원님'처럼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모임이나 활동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건 팁인데요. 나이 들어 부부 사이가 단지 가족 사이밖에 되지 않는다면, 가끔 서로를 아무개 씨 하고 이름을 불러보세요. 느낌이 참 색다릅니다. 마치 연애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드실 거예요.
참, 여담 한 마디 더 할게요. 요즘 중장년들이 자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보통명사인 ‘아들’, ‘딸’ 하고 부르는 것도, 이상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내 딸, 내 아들을 그렇게 보통명사로 부른다는 건, 내 딸 내 아들이 여느 딸이나 아들과 같다는 얘기잖아요? 특히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젊은 엄마들이 많은데, 벌써 장가가면 ‘남의 아들’ 될 생각에 미리 정 떼느라 그러는 건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