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사랑은 늘 현재진행형
겨우내 흑백영화 같던 세상도, 봄이 되면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들과 새로 돋아나는 연두색 잎새들 덕분에 그야말로 총천연색으로 컬러풀하게 탈바꿈하게 됩니다. 더욱이 각 지자체들마다 조경을 잘해놔서 봄이 되면 그 지역을 대표하는 봄꽃 축제들이 화려하게 열리지요. 그래서 해마다 봄에는 이 꽃이 지면 저 꽃이 피고, 저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연이어 피어나면서, 여기를 봐도 꽃대궐, 저기를 봐도 꽃천지입니다.
특히 봄꽃들 가운데 벚꽃은 분홍색으로 화사하게 피어나서 유독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데요. 그런 벚꽃 그늘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꽃처럼 예쁜 청춘’ 들을 보면, ‘그래, 딱 이맘때야. 나도 20대 때 벚꽃이 활짝 핀 밤에 연인과 팔짱을 끼고 길을 걸었지’ 이렇게, 나도 모르게 옛 추억에 젖게 되는 분들 많으실 거예요.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꽃들은 변함없이 아름다운데, ‘나는 이렇게 변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불현듯 마음에 일교차가 생기기도 하실 겁니다.
돌이켜보면 코로나 시절에는 봄이 오고 꽃들이 피어나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꽃구경하는 사람들이 없었지요. 물론 보는 이 없어도 봄은 오고,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지만, 정작 꽃구경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외롭게 홀로 피었다 지는 꽃’보다 더 외로웠고, 봄이 왔어도 봄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인파로 길이 막히고 혼잡스러워도 봄에는 꽃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봄답다고나 할까요. 사실 꽃들은 자기를 보라고 예쁘게 피어나는 거잖아요. 비록 그 목적이 수분을 위해 벌과 나비를 부르는 것이라고 해도, 그 덕분에 사람들도 옆에서 꽃구경이라는 호강을 선물처럼 누릴 수 있는 건데요. 아마 꽃들이 노래를 한다면 이런 노래들을 부르지 않을까 싶어요?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
그러니까 꽃구경 나온 분들은 꽃들의 부름에 제대로 답을 하신 겁니다. 젊건 나이 들었건 사랑의 인연으로 벚꽃길을 걷는 분들은, 꽃을 찾은 아름다운 한 쌍의 나비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젊은 시절 ‘분홍 벚꽃 구름’ 아래 뽀뽀도 하고, 팔짱 끼고 걷던 연인과 결혼해서,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손 꼭 붙잡고 걷는 부부들은 명실공히 참 행복한 분들이지요. 또 꼭 손을 붙잡지 않고 떨어져 걸어도 함께 꽃구경 나온 부부나, 친구와 함께 꽃구경 나온 분들도, 꽃들의 달달한 부름에 답할 줄 아는 멋진 분들입니다. 꽃을 보고 ‘예쁘다’, 꽃의 향내를 맡고 ‘향기롭다’고 느낄 줄 알고, 그 좋은 느낌을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나눌 줄 아는 거니까요.
사실 살다 보면 꽃이 피어도 꽃이 피었나 보다, 꽃이 져도 꽃이 졌나 보다 식으로 별다른 감흥 없이 살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먹고사는 게 바빠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살다 보면 꽃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수 있거든요. 물론 그럴 때 꽃구경으로 힘든 마음을 환기시키고 재충전을 하면 좋으련만, 당장 하루하루 사는 게 버거워서 그런 데에 쓸 마음의 여유나 에너지가 없다고 느끼는 거지요.
그런데 짐작하시겠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과 생활 전반에 ‘경고등’이 켜진 겁니다. 혹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벚꽃이 마음을 간지럽혀도 ‘아, 예쁘다, 아, 사랑하고 싶다’ 이런 감정이 떠오르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까요? 아, 그러면 정말 큰일입니다. 가령 배우자가 벚꽃 구경하러 가자고 했을 때 “굳이 정신없이 복잡한 데를 왜 가? 우리 아파트 단지에도 꽃 폈더라, 그거 봐” 이러거나, 아니면 “그런 데는 젊은 애들이나 가는 거야. 나이를 생각해” 만약 이런 식의 대화를 하신 부부들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부부 사이의 애정전선을 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가슴 설레는 사랑은 언감생심 바라지 않더라도, 애정표현이나 스킨십을 언제 했는지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거지요.
청춘 시절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사랑은 아주 작은 것, 별 것 아닌 것을 함께 하면서 행복해하는 거잖아요. ‘자기가 벚꽃보다 훨씬 더 예뻐’ 이런 말도 안 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말을 당당하게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손 한 번 더 잡아보려고 애쓰고, 실상 달기만 하고 맛도 없는 솜사탕을 들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표정으로 ‘자기 한 입, 나 한 입’하면서 서로 뜯어 입에 넣어주고,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계속 ‘하하 호호’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건, 분명 위대한 ‘사랑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그런 말과 행동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독하게 유치하게 보여도, 사랑하는 둘 사이에는 지극히 아름답고 당연한 교감의 표현이니까요.
물론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요. 그건 연애시절의 불같은 사랑 - 육체적인 사랑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나이 들면 불같은 사랑은 식을 수 있지만, 사랑 자체가 퇴색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하는 세월이 더해질수록 곰삭은 깊은 정이 쌓이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어느덧 눈가에 자글자글 주름이 잡힌 배우자를 보면서도 ‘늙어서 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당신은 고와’, ‘여전히 당신은 멋있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닭살 같은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주름이 별로 거슬려 보이지 않고, 설사 주름이 눈에 띄어도 그 주름은 ‘미운 주름’이 아니라 ‘미안한 주름’이 되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주름으로 미워졌다는 생각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고생해서 주름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또 애정표현이 적어진 남성들이 변명처럼 하는 우스갯소리가 ‘가족끼리 왜 이래?’라고 한다지요. 아니, 그럼 바람이라도 피우겠다는 건가요? 세상에 제일 실속 없는 게, 남한테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면서, 정작 평생을 함께 할 자신의 배우자에게는 무뚝뚝한 겁니다. 심지어 ‘잡은 고기에게 먹이 주는 것 봤냐?’는 고약한 말도 있는데요. 세상에 자기 ‘고기’에게 먹이를 줘야지, 자기 ‘고기’에게 먹이를 안 주고 대체 어떤 ‘고기’에게 먹이를 주겠다는 건가요? ‘잡은 고기’가 아내이든 남편이든 간에, 부부는 서로에게 계속 ‘먹이’를 줘야, 평생 알콩달콩 부부로서의 재미를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실제 인생선배들께서는 ‘나이 들면 뭐니 뭐니 해도 부부밖에 없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꽃피는 봄이 되면 내 마음을 한번 잘 살펴보세요. 꽃피는 봄에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천년 된 고목도 봄을 맞아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데, 봄이 되어도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더욱이 부부는 서로 평생 사랑하기로 약속한 사이잖아요. 만약 “자기가 이팔청춘인 줄 알아? 무슨 사랑 타령이야” 한다면, 또는 우스갯소리라도 “무섭게 무슨 사랑 타령이세요?” 이런다면, 그동안 너무 메마른 감정으로 살아온 부작용 탓이 큽니다. 그러니 그럴 땐 얼른 달콤한 사랑의 노래를 듣는다든지, 연애감정을 되살려주는 로맨스 영화를 찾아보신다든지, 아니면 돋보기를 쓰고라도 연애소설을 읽어 보시지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사랑이 과거형이면 우리는 쉽게 늙어버립니다. 사랑은 우리 인생에 늘 현재진행형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