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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에 겨운 소리

by 이용석 Jan 31. 2025

명절 연휴가 끝이 보인다. 오늘은 금요일, 공휴일이 아니지만 나는 이번 달이 안식월이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쉬는 날이다. 마지막날까지 알차게 쉬어야겠다.


설에 부모님 집에 가서, 여느 때처럼 식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엄마 아빠는 부쩍 늙으셨다는 걸 느꼈고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빠르게 조카들은 성장해 있었다. 자기가 시나모롤이라고 주장하던 떡국 먹고 열 살이 된 꼬맹이는 이제는 시나모롤보다 고양이가 더 좋다며 고양이, 고양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봄날은 간다> 유지태처럼 외쳤는데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해봤자 꼬맹이는 들은 척도 안 했을 거였기 때문이다. 6학년으로 올라가는 언니는 이제는 삼촌과 잘 놀아주지 않는다. 자식 키우는 친구들에게 들은 바로는 중학생에 가까워질수록 맨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어른들과 대화는 안 한다더니 딱 그 느낌이다. 아직은 또래보다는 순딩순딩한지라 삼촌과 보드게임도 하고 장난도 치지만 불과 한 달 전과 비교해도 훨씬 과묵해졌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아이, 아니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의 경우 차례도 안 지내고 밥상에 잡채가 올라오는 것 말고는 사실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게 명절이지만, 이상하게 명절이 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내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엄마의 희생과 아빠의 노력으로 우리 집은 아주 조금 가난하고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 아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프셨고 집에서 그 병간호를 다 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젊은 날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까지 넘어오지는 않았다. 


울 엄마는 에나 지금이나 큰 욕심이 없는 분이다. 내 동생이 엄마를 닮아서 직장생활이나 회사 다니는 것에 하나도 욕심도 관심도 없는 거 같다. 그런 성정에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연달아 아프셨으니 엄마는 회사 다니고 싶어도 다니지 못했을 성싶다. 아무튼 나는 그래서 학창 시절에 늘 학교 파하고 집에 오면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따뜻한 밥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날마다 저녁마다 밥을 새로 지으셨다. 그 밥이 얼마나 따뜻한 정성인지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내가 잘 모르는 건 또 있었다. 광주 서초등학교에 다녔던 6학년 때(내가 다닌 건 국민학교였지만), 나는 친구들과 노는 데 크게 재미를 들였다. 뭐 5학년때까지는 안 놀았냐 하면 그런 건 아니지만, 6학년이 되자 그전까지는 서로를 돌로만 보면 다행이었고 권성동 이재명 보듯 저주의 말만 주고받던 여자아이들과도 같이 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삼익아파트로 몰려갔다. 우리 무리 중에 두 명이 그 아파트에 살았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친구 집에 들어가서 놀곤 했다. 그때 가장 많이 갔던 친구네 집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늘 경비실에서 열쇠를 찾아서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곤 했다. 


나는 그게 그렇게나 부러웠다.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었고, 우리 엄마는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직접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대문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엄마가 늘 반갑게 맞이해 주었기 때문에. 현관문 열고 들어간 아파트에서 어른들 한 명도 없이 우리끼리 라면 끓여 먹었던 것보다도, 성냥갑으로 불장난을 한 것보다도, 동네 중국집에 장난 전화 걸며 놀 수 있었던 것보다도 나는 경비실에서 열쇠를 찾아서 현관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는 그 행동이 그렇게나 부러웠다. 6학년 2학기 때 운암동 넘어 동림동 삼호가든아파트로 이사 갔다. 내 인생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나도 이제 경비실에서 열쇠를 찾아서 직접 현관문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무척이나 기대했지만, 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가 늘 문을 열어주셨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큼한, 방금 지은 밥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맛있는 갓 지은 밥 먹을 생각에 내 배는 꼬르륵거렸지만 나는 현관문을 직접 열지 못한 것을 날마다 적잖이 실망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에 겨운 소리다. 


복에 겨운 소리는 더 있다. 우리 집은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서울 방학동에서 화곡동으로, 부산으로, 광주로 이사를 갔다. 초등학생에게는 거의 지구에서 화성, 금성을 거쳐 목성으로 이주하는 것처럼 세계가 바뀌는 일이었으리라. 아무튼 동네가 확확 달라지니 우리 식구들은 동네에 오래 알고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외동아들이어서 친척이 없었고, 큰 외삼촌네는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나는 옷이나 장난감,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전과나 문제집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새 학기가 되면 과목별로 전과를, 그리고 해법수학 같은 문제집을 새로 사야만 했다. 


언니나 오빠, 누나와 형이 있는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전과와 문제집을 물려받았다. 그 아이들은 손때 묻은 전과와 문제집을 펴고 자신의 형과 누나, 언니 오빠가 이미 푼 흔적들을 지우개로 지우는 것이 학기 초에 하는 일이었다. 아는 형이나 누나가 없던 나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손때 묻은 전과와 문제집을 물려받는 것이, 학기 초마다 지우개로 전과와 문제집을 박박 문질러 지우는 것이 왜 그리 부러웠을까? 아이들이 투덜대며 지우개로 흔적을 지우는 동안 나는 빳빳하기 이를 데 없는 두꺼운 전과를 길을 들이느라 애를 썼다. 아마도 몇 번은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표했으리라. 물론 복에 겨운 소리 말라는 지청구와 함께 나는 눈치를 배워갔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엄마로부터 따뜻한 돌봄과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친구들과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확실히 그렇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의 장점들-낙천적이고 밝은 성격과 높은 자존감 같은 것들이 실은 엄마의 사랑과 희생 덕분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렇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 앞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너무 부러웠던 거 같다. 지금 나는 아파트에 혼자 살지만 이제는 번호키가 집집마다 달려있고 나는 여전히 경비실에서 열쇠를 찾아서 열쇠로 현관문을 여는 것을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혼자 문 열고 들어가는 게 부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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