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2024 첫 러닝 비하인드 스토리

by 뭉클


10km 가늠하기

"10km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거북이처럼 기어가더라도 나는 가보고 싶었다. 적어도 걷지는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벚꽃이 흐드러진 4월이 되니 지난봄의 벚꽃 빛깔 레깅스가 떠올랐다. 복숭아빛 길을 헉헉대며 뛰던 모습도.


작년엔 여행 전 다이어트 겸 체력 증진이 목표였다면 이번엔 마라톤 출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도 더해졌으므로 달리기에 관한 책과 영상도 보면서 임한다. 작년에는 삼성 헬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AI 목소리의 응원을 들으며 달렸는데 올해는 케이던스를 180으로 맞춰주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뛰기로 해서 운동용 블루투스 이어폰을 구입할지 말지부터 고민이었다.




<러닝 전 생각>

이미 블루투스 이어폰이 있지만 운동용으로 쓰기엔 뭔가 찝찝해. 그렇지만 쓸데없이 비싸군. 가성비 아이템도 있지만 역시 브랜드 이어폰이 예뻐. 근데 블루투스 이어폰에 기대하는 게 고작 음악의 비트 아닌가?


<러닝 후 생각>

케이던스 180 비트가 아니었다면 봄 햇살 아래 타는 벚꽃들이 불꽃으로 보였을 거야. 생각보다 음질이 중요하다. 멜로디와 리듬, 비트의 기쁨은 러닝 초반의 기쁨이다. 물론 7km를 넘어서는 순간엔 비트만이 살길.





첫 3-5km 지점에서는 몸이 덜 풀리긴 했지만 벚꽃길과 신나는 리듬이 더해져 확장되는 공감각적 쾌감이 폭발했다. 나는 러너인지 댄서인지 모를 흥겨움을 느꼈다. 어쩌면 가장 조심해야 할 때다. 속도를 내고 싶기 때문이다. 이때 10-20%를 써야 나중에 뒷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원래 6-7km는 무리 없이 뛰는 수준이라 반환점(5km)을 돌 때쯤엔 체력이 남아도는 걸 넘어 몸이 풀려 속도가 빨라지기까지 했다. 컨디션이 좋아서 10km는 거뜬할 것 같았다. 건방지게 11km까지 뛰는 상상도 했다.


날씨가 유독 더운 탓도 있었지만 단거리 인간인 나는 7km 직후부터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딱히 당황스러운 사실도 아니지만 그땐 몹시 그랬다. 앞으로 온 만큼 가야 하는데 텐션이 훅 떨어졌으니까. 연료통에 빨간 불은 들어오는데 근처에 주유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공포랄까.


게다가 8-9km 지점에선 첫 러닝이라 시행착오가 있었다. 삼성헬스 프로그램이 측정한 데이터(거리, 케이던스 등)가 갤워치의 데이터와 차이를 보여서 10km를 다 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던 것. 폰을 다시 웨이스트백에 집어넣다 버튼이 눌렸는지 음악까지 꺼졌다. 음악이 꺼지자 눈앞의 벚꽃이 조금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가장 비트가 필요한 순간에 비트가 사라지다니. 나중에 다시 켜서 달리긴 했지만 좀 아찔할 정도였다. 어쩌면 나는 첫 러닝임에도 무의식적으로 기록에 대해 압박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0km를 60분 안에 들어오고 싶었으니까.


10km를 걷지 않고 뛰어 완주한 것만으로 스스로에게 칭찬을 퍼붓고 있지만 어쩌면 이 마라톤의 진짜 의미는 초반 레이스의 페이스 조절에 있지 않을까. 7km 지점부터 도착지 사이에서 벌이는 자기와의 싸움이나 완주의 대단함에 가려진 진짜 알짜.


뜨거운 태양과 맞짱 뜨며 달리고 나니 무심코 챙겨 나온 선글라스, 모자, 이어폰의 소중함을 실감했다. 그리고 몇 가지 작지만 큰 디테일을 메모했다. 케이던스용 영상은 50분짜리가 많으니 반드시 두 개를 준비하거나 연속재생할 것. 웨이스트백은 몸만큼 무겁게 느껴지는 폰을 맡아줘서 러너를 자유롭게 함. 날씨가 더운 날엔 모자, 선크림, 고글, 쿨토시, 물 필수. "그냥 일단 나가서 뛰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러닝에 꼭 필요한 것들이 많아서 리스트를 아예 만들었다. 리스트만 훑으면 빠뜨리는 것 없이 바로 나가 뛸 수 있으니까.


역시나 가장 중요한 건, 초반 페이스 조절이다. 취약한 지점인 7km에서 초반에 아껴둔 텐션을 꺼낼 것. 초반에는 너무 잘 뛰었고 신도 나고 힘도 났는데 나중에 급속도로 텐션이 떨어졌다고 했더니 K가 말했다.


"그때를 대비해서 초반에 페이스 조절하려고 천천히 뛰는 거지."


K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초반에 나에게 계속 천천히 달리라고 했던 거였군. K의 말을 귀담아듣자.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나: 나한테 10km는 진짜 도전이야. 최대로 뛴 게 9km 조금 넘겼고 그것도 걷다 뛰다 겨우 겨우 채운 거였어.


K: 아니야! 작년에 자기가 중간에 걸은 건 계산에 안 넣어서 그렇지 자긴 10km 뛴 거야.


나: 그런가...


나 자신을 키우는 것이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시스템이 되어주는 인플루언서다. 뛰고 싶지 않은 날도 서로에게 산소통이 되어 준다. 같은 호흡으로 뛰다 보면 사랑보다 중요한 게 예의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나: 3km까지는 수월하게 뛰는 거 같은데 5km, 7km, 10km는 결국 존버 아닐까. 그렇게 정신승리하고 버텨보려고.


K: 자기 왜 자기 자신을 자꾸 그렇게 낮게 생각해? 영어 2등급 정도 나오는 애가 본인 5, 6등급 나온다고 그러는 거랑 비슷해.


(오 아주 확 와닿는 비유다.)


그는 내게 '할 수 있다' 정도가 아니라 '그쯤은 당연히 해낸다'라고 말해준다. 10km를 60분 안에 완주하는 과도해 보이는 목표를 세울라치면 이렇게 말한다.


"1시간 10분 안에만 들어와도 아주 훌륭해. 일단 무리해서 시간 맞추는 것보단 완주가 목표야."


1km를 5분 페이스로 달리면 1시간 안에 달린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나는 5분 페이스와 7분 페이스를 오간다. 각종 기합과 괴성이 오가고 어느새 내가 땅을 보고 달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개 들고 앞에 보고 뛰어야 돼!"


바람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 봐준다는 생각에 앞으로 앞으로 내딛고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서로가 있어서 적당히 달리려다 조금 더 힘을 낸다. 좋은 영향만큼 나쁜 영향도 끼칠 수 있지만 좋은 사람이 되어주려는 마음은 더 나은 하루를 만든다.




마라닉 TV에서 초보 러너의 페이스 조절에 대해 말하는 영상:

https://youtu.be/582NA-tjDwU?si=mNuxSvEdb-KWL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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