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기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시를 가지고 있는 시인인지를 안다.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다만 자신이 시인임을 스스로 무시하고 살아가다가 죽거나 시인이면서도 시인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을 뿐이며 심지어 나는 자신 안의 시인을 일부러 살해하는 사람들조차 자주 본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애써 괴물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날개를 하늘에서 사용하지 않고 발의 부스러기나 계단쯤으로 여기다가 차에 치여 길에 찌그러져 말라 붙어 있는 저 비둘기들의 사체처럼.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이응준
지난 시 워크숍에서 김유림 시인이 언어유희와 메타적 감각을 선보였다면, 최재원 시인은 과감, 패기, 솔직함이 그득그득한 감각적 이미지 그 자체였다. 중성적인 외모에서 예상했듯 성(정확히는 여성성과 남성성 그 사이를 오가는)에 대한 농밀한 묘사가 남달랐다.
장혜령 시인은 최재원이 "용기 있는" 시인이라고 했다. 보통의 인간은 억압하고 숨기지만 어찌 보면 범죄도 아니고 숨길 건 아닌데 사회적으로 우회해서 속삭이듯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하는 패기.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안경을 읽고 옷맵시를 읽었다. 자신이 몸을 쓰는 방식으로 눈앞의 생을 감각한다는 사실과, 오직 필름 한 컷으로만 응축하는 일의 어려움을 배웠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해.
시인과 신과 친구들이 말했다.
시는 '어떻게 보이는지를 설명하는 것.' 친절하게 설명할수록, 설명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글 덩어리가 된다는 걸 알았다. 읽는 사람을 고려하고 톤과 장소, 상황을 통일하는 정돈된 자유를 만났다. 프로다운 쿨함, 흐트러지지만 선은 넘지 않는 지조 같은 것.
디테일하고 솔직하게,
시인은 내게 다른 눈깔로 갈아 끼라고 했다.
좀 더 적나라하고 직설적인 톤으로 쓸 수 있어. 묘사를 바꿔보고, 의성어로 표현해 보고, 좀 더 가볍게, 좀 더 재밌고 웃기게. 슬프다고 슬픈 시 밖에 못 쓰는 내게 웃긴 시는 도전이다. 그래서 끌린다. 아주 웃긴 자의 슬픔이 담긴 시가 세상에서 제일 슬플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90분과 15분과 그 밖의 무한대의 시간에 모든 것이 시가 되었다. 이를 테면, 불일치는 웃긴 것이고(역도-아줌마),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몹시 지루한 일이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굴러가며 퇴근하는 무용수).
명확함이 곧 역량이라고 믿는 교사 겸 산문쟁이 민정손에겐 시를 덕지덕지 쓰는 친절함은 덫이 되었고, (먹고사는 삶이 나를 이렇게 만들지 않냐는 반문에) 시인은 내게 다 쓴 후에 다시 보는 자유를 가지라고 했다.
지나치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나답지 않은 것을 적으면서 왜 해방감을 느끼지?
(나 다운가?)
이거 쓸 때 즐거웠지? 그랬을 거 같아.
쓰는 사람이 즐거우면 독자도 즐거워.
스스로 쓰고도 놀라야 독자도 놀란다.
시는 삶을 보는 눈깔을 뒤집어 놓는다. 자발적으로 뒤집는 세상은 아름답고 웃기고 아직 기한이 충만한 카카오톡 기프트콘 마냥 든든하다. 나만의 콘텐츠를 찾아 앓던 시간을 지나 그간의 고민들이 에너지가 되었다. 상처가 나의 자유가 되었다. 그것은 나만의 커리큘럼이다.
큐레이터가 되기 전에 시인이 먼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