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캐는 날

벚꽃은 화려하지만 금방 지고, 매화는 피어서 봄을 알린다.

by 돋을볕

지난겨울, 오랜만에 엄마의 손을 잡고 밭으로 나섰다. 엄마가 주는 앉은뱅이 의자에 두 다리를 끼워 넣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걸터앉았다. 엄마가 시금치를 뜯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시금치를 캐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시금치의 가운데 잎 하나를 살짝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금치의 뿌리 앞부분을 농업용 칼로 뚝 끊어내었다. 시금치로 한 관은 4kg이다. 나는 민들레처럼 가벼운 시금치를 70매에 6천 원을 주고 산 파란 비닐봉지에 넣었다. 시금치가 상하지 않게 꽃다발처럼 조심스럽게 어르며 봉지에 꾹꾹 눌러 담고 바닥을 툭툭 내리쳤다. 이렇게 4kg를 채우면 7천 원을 받는다고 했다. 대목이라서 4~5천 원 하던 시세가 7천 원으로 올랐다고도 했다.


중량으로 거래하기에 시금치를 크게 키워 팔면 수월하겠건만, 엄마는 그러면 시금치가 질겨지고 단맛이 덜해져서 안 된다고 하셨다. 게다가 장사꾼이 가지러 온다고 할 때, 얼른 준비해 놓아야 한다고 했다. 이마저도 “보고 연락하겠다”라고 말했기에 안 가지러 오면 그냥 이 사람 저 사람 나눠주고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채소는 금방 상하고, 작물에도 때가 있어서 이젠 봄배추를 심어야 한다고 하셨다. 시금치를 뜯으며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그냥 내가 좀 더 도와드려서 엄마가 따뜻한 집 안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좀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처럼 속도는 나지 않고 내가 도움이 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이 생길 즈음, 구원 투수인 아빠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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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는 마치 ‘시금치를 뜯는 기계’처럼 손발이 척척 맞으며 굉장한 속도를 시금치를 뜯었다. 내가 뒤 쳐질 때마다 엄마와 아빠가 시금치를 뜯는 구역은 더 넓어지고 내 구역은 좁아지면서 셋이 옆에서 나란히 시금치를 뜯었다. 결혼 이후 내내 시부모님과 함께 살아온 엄마는 이따금 어른들에게 배웠다면서, 상황에 맞는 옛말을 아주 구성지게 표현하곤 하는데 오늘은 거기에 아빠의 입담까지 더해져 셋이 깔깔거리며 시금치를 뜯었다. 오늘의 최고 명대사는 바로 이것이었다.


“깔 짐은 넘어졌지, 비는 오지, 해는 넘어가지, 설사 똥은 마렵지, 게타리는 안 풀어지지, 소는 뗘났지, 애는 울지.”


무슨 뜻인지 묻자, 너무 바빠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난처한 상황을 뜻하는 말이란다. 해석하자면 ‘깔’은 소를 먹이는 짚이나 건초 등 ‘꼴’의 사투리이고, ‘깔짐’은 꼴을 베어지고 온 지게를 뜻한다. 즉 소를 먹이기 위해 밖에 나가 꼴을 잔뜩 베어 온 지게가 넘어진 상황. 소는 젖은 짚이나 풀은 안 먹기에 늘 바싹 말려주어야 하는데 거기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는데 ‘게타리’, 즉 허리춤을 묶은 끈이 풀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밖에서 풀을 먹이기 위해 밭에 묶어 둔 소가 겁이 나서 말뚝을 끊고 도망간다. 거기에 아기도 울기 시작한다.


웃느라 허리가 빳빳해지고 손목이 시큰해진 것도 잊은 채 시금치를 뚝뚝 뜯어나갔다. 어제저녁으로 먹은 추어탕과 집 근처에서 하는 굴 축제와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로 깔깔거리며 시금치를 뜯다 보니 주변이 어둑해지고 너무 추워서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울적하지 않았다.


저녁으로 시금치를 무치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또다시 웃음꽃이 핀 설야. 다음 날도 엄마를 따라 시금치를 뜯으러 나섰다. 그리스 스토아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은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했다. 세상엔 화려하고 특출 난 사람들로 눈이 부시지만 때론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한 법이다. 내세울 것도, 변변한 명함도 없어도 바람처럼, 시처럼 사는 이름 없는 '평안함'말이다. 벚꽃은 화려하지만 금방 지고, 매화는 피어서 봄을 알린다. 지구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아도, 우리가 서 있는 곳 자체가 푸른 약초가 돋아나는 곳이다. 정원에는 꽃도 피지만, 단단한 돌도 필요하다.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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