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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Jul 28. 2023

다시 붙여 놓을까요?

농사를 모르는 자의 최후


나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사일을 전혀 모른다. 친정에서도 아빠가 공무원이셨고 작은 텃밭을 가꾸시던 엄마도 나에게 밭일을 시키신 적이 없다. 시부모님이 시골에서 과수원도 하시고 밭일도 하시지만 나한테 농사일을 도와달라고 하신 적이 없다. 이 말은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농사일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란 뜻이다. 다들 쉽게 키운다는 산세베리아나 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게 나다.


학교에서는 언제부턴가 학교 텃밭을 이용해서 여러 작물을 심어 키웠다. 아이들이 보살피기도 하고 관찰도 하고 열매가 달리면 직접 따먹어보거나 집에 수확물을 가져가곤 했다. 농사일은 몰랐지만 대부분은 교장선생님과 다른 분들이 대부분 가꾸시고 아이들과 작은 소일거리만 하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농사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셨다. 그 해 학교농장에 대한 예산을 받아오셔서 텃밭을 더 늘리고 더 많은 작물을 풍성하게 심으셨다. 한쪽에 연꽃이 피는 작은 연못까지 만드셨다. 여름이 다가오자 그곳은 초록으로 뒤덮였다. 작물은 참 다양했다. 단골손님인 방울토마토, 고추를 비롯해 상추, 쑥갓, 오이, 옥수수, 이름 모를 쌈채소들까지. 아니 참외와 수박, 벼까지 심었다. 아! 포도도 있었지. 그 넓지도 않은 곳에 오만가지 농작물들이 그득했다. 밭고랑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덩굴들이 가득해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상태가 되어간다.


농작물이 익어가자 내가 미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신 교장선생님이 부탁을 하셨다.

“정선생님, 허수아비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그렇게 시작한 허수아비 만들기. 학교 기사님께서 각목으로 뼈대를 만들어 주셨다. 거기에 다 떨어진 애들 담요를 잘라 머리와 몸을 만들었다. 못쓰게 된 남편 러닝으로 감싸 하얀 얼굴을 만들어 표정을 그렸다. 그리고 작아진 애들 옷을 입혔다. 커다란 인형눈알은 유치원 선생님께서, 커다란 손바닥 장갑은 기사님이 협찬해 주셨다. 제법 그럴듯한 허수아비 남매가 완성되었다.


풍성한 작물에 허수아비까지 구색이 아주 잘 갖추어진 학교 밭을 교장선생님은 자랑하고 싶어 하셨다. 매일 밭을 돌보시면서 벌레가 생기면 친환경 약을 뿌리시고 손수 잡초도 뽑으시면서 아주 정성껏 가꾸셨다. 간혹 학교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보여드리며 설명하는 걸 좋아하셨다.


어느 날, 교육청에서 장학사님이 텃밭을 보러 내일 오신다고 하셨다. 오전에 출장으로 나가시던 교장선생님께서 부탁을 하셨다.

“정선생님, 애들이랑 고추밭에서 익은 것들 좀 따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고추밭에 가서 달려 있는 고추들을 따기 시작했다. 한창 여름의 열기를 먹은 고추들은 쑥쑥 자라 있었고 아이들은 신나게 따기 시작했다. 기사님께 수확물을 넣을 포대를 2개나 얻어 아이들과 열심히 채웠다. 네 이랑이었던 고추밭에서 이제 달려있는 고추라고는 몽당연필 같은 작은 아기 고추들 뿐이었다. 짧은 점심시간에 미션을 해치운 우리들은 수확물 포대를 행정실에 맡기고 뿌듯하게 교실로 올라왔다.


5교시 수업을 마친 후 쉬는 시간, 갑자기 인터폰이 울렸다.

“정선생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고추들 다 땄어요?”

“네, 말씀하신 대로 잘 익은 거 다 땄는데요?”

“아이고!”

전화기 너머 탄식을 하시는 교장선생님 목소리에 어리둥절했다.


수업이 끝나고 얼른 내려가 보았다. 학교 텃밭 앞에서 허탈하게 서 계셨던 교장선생님이 보였다.

“왜 그러시는데요, 교장선생님?”

“정선생님, 익은 고추만 따라고 했는데 다 딴 거예요?”

“네, 어제 말씀하신 대로 익은 거 다 땄는데요.”

“익은 거, 빨간 거만 따라는 거였어요, 빨간 고추만 따서 말리려고 한 건데…”


아뿔싸. 익은 게 빨간 거였다니. 나는 먹을 정도로 다 자란 파란 고추도 다 익은 줄 알고 아이들과 신나게 다 땄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고, 내일 장학사님 오시면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아이고, 죄송해요. 저는 먹을 만큼 큰 것들 다 따라고 하신 줄 알고…”

“에휴… 어쩔 수 없지요.”

나에게 화도 못 내시고 어금니를 꽉 무시는 교장선생님을 보며 너무 죄송스러워 한 마디 했다.

“저.. 교장선생님, 이쑤시개로 다시 붙여 놓을까요?”


그날 교장선생님은 나한테 화도 못 내시고 얼굴만 울그락불그락하셨다. 결국 다음 날 장학사님은 고추 없는 고추밭을 보고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풍성한 밭을 자랑하고 싶으셨을 교장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지나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는 참 어이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후 다른 학교에 가서 학교 텃밭을 학급별로 가꾸라고 주실 때마다 미리 이야기한다.

“전 시골에서 자랐지만 전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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