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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상플러스 Mar 12. 2021

구읍뱃터에머물다


  늦깎이 신학생 권사님이 방학을 했다. 학기 중에는 공부에 방해될까 봐 가급적 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도 자제했다. 커피와 바다를 좋아하는 공통점 외에 이야기도 잘 통해서 여덟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자주 어울렸던 권사님이다.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을 하는 권사님이 작년에 신학 대학 3학년으로 편입한 후부터 방학 외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권사님은 신학생이 되기 전, 도서관에 다니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책 읽으면 머리 안 아파? 잠깐 쉬러 내려와. 휴게실이야. 맛있는 커피 사 왔어."

  도서관에 있다고 하면 권사님은 종종 간식거리와 커피를 사들고 왔다. 도서관의 다른 공간을 이용하지 않고 휴게실에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돌아가곤 했다. 가끔은 권사님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짐을 챙겨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집사님이 도서관을 찾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이렇게 좋은 시설을 왜 그동안 한 번도 이용하지 못했는지 몰라."

  신학생이 되고서야 권사님은 도서관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권사님은 이제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쓰고, 시험공부를 한다.


  나는 주일 오후 예배까지 마치고 바로 도서관으로 간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한두 시간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이다. 권사님도 주일 오후 도서관 멤버에 합류했다. 멤버라고 해 봐야 나랑 달랑 둘 뿐이지만.

때로는 공부는 뒷전이고 휴게실에서 테이크 아웃해 온 커피를 마시거나 도서관 앞에 있는 카페에 가서 일주일간 어떻게 살았는지 수다만 떨고 돌아오는 날도 있다. 그래도 다음 주일에 우리는 또 도서관으로 향한다.


  퇴근 무렵, 권사님이 방학 기념으로 바다를 보러 가자고 전화를 했다. 올해 75세 된 권사님도 모시고 가기로 했다. 같은 교회 다닐 때 우리 셋은 나이를 떠나 잘 어울려 다녔다. 내가 영종도로 이사 온 게 2009년이니 벌써 10년 지기 친구다.

  "퇴근하겠습니다."

  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자마자 퇴근을 알리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는 차에 타는 내게 권사님은 어디로 갈 건지 물어 왔다. 내 기분에 따라 어디로 갈 건지가 정해진다.


  "오늘은 구읍뱃터 갈까요? 일단 커피 한 잔 마시고 바다 보자고요."

  내 말에 권사님은 구읍뱃터로 향했다. 호텔 1층에 위치한 바다 전망 카페는 문을 닫았다. 구읍뱃터 쪽으로 가면 항상 가던 카페다.

  비 오는 어느 날,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책을 읽으며 행복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도서관이 휴관인 날이었을 거다. 도서관이 휴관을 하면 딱히 갈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무조건 카페에 간다. 집에 있으면 늘어 지거나 집안일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시간이 버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깝다.

  추억의 장소가 문을 닫았는데 문 앞에 어떠한 설명도 없다. 약간 배신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차를 돌려 선착장 쪽으로 갔다. 그곳에도 바다가 보이는 카페가 있다. 2층에 올라가면 월미도가 보이는 곳이다. 그곳도 바다전망이긴 하지만 그곳의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커피는 생략하기로 했다.


  목요일 오후, 구읍뱃터는 한산했다. 주말이 아니면 그다지 붐비지 않지만 다른 날보다도 유독 한가했다. 바다에서 갓 잡은 해산물을 빨간 고무대야에 넣어 파는 장사꾼도 없었다.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어서 그런 듯했다.

  작은 어선을 댈 수 있는 경사진 작은 선착장에도 사람이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낚시를 하고 있는 남자 한 명과 운동 나온 듯한 남자, 갈매기 몇 마리, 그리고 우리 셋이 전부였다.


  "여기 돗자리 펴고 앉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사님은 차 안에 돗자리가 있을 거라며 돗자리를 찾으러 갔다. 그동안 나이 든 권사님과 나는 한가로이 정박해 있는 배 두 척에 눈길을 주었다.

  배 한 척은 육지를 향해, 다른 한 척은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두고 있었다. 육지를 향한 배는 왠지 모를 피곤함이, 바다로 향한 배는 출항 준비를 끝낸 청년의 기상이 느껴졌다.


  배 주변을 맴도는 갈매기는 배 위에 앉거나 드러난 갯벌에 잠시 앉아 쉬기는 했어도 먹이 활동은 하지 않았다. 월미도와 구읍뱃터로 오가는 여객선을 따라다니며 새우깡을 구걸하는 게 몸에 밴 탓이다. 구읍뱃터의 갈매기들은 다른 바다의 갈매기들보다 뚱뚱했는데 사람이 먹는 과자를 먹어서 그리된 것 같다. 새우깡을 받아먹는 갈매기가 신기해서 사람들이 하나둘 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 먹이 활동하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구읍뱃터의 갈매기는 게으르다. 손쉽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데 굳이 어렵게 사냥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배를 타면 으레 새우깡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온 관광객들은 새우깡을 던져 주며 인증숏을 찍느라 분주하다. 나는 단 한 번도 새우깡을 산 적이 없다. 나 한 사람이라도 갈매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배와 갈매기를 보고 있는 동안 돗자리를 가지러 차에 갔던 권사님이 돌아왔다. 우리는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이곳에 돗자리를 펴고 앉을 생각을 한 건 처음이다. 사람의 왕래가 많으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향해 선착장이 비탈져 있어서 앉기가 다소 불편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향해 앉았다. 두 분 권사님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돗자리에 누웠다. 밖에 나와 누워서 하늘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이다. 눈에 거치적거릴 것이 없이 온통 하늘뿐이다. 하늘에 조각구름이 떠간다. '여유롭다. 좋다'라는 생각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일어나 앉으니 바다 건너편에 조그만 섬, 작약도가 보인다. 젊은 시절 기타 선생과 함께 들어갔다가 배가 끊겨 인생이 바뀌었다는 한 집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 집사는 기타 선생과 결혼해 지금은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섬을 보며 우리 셋은 그 집사의 이야기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우리는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위 상점에 네온사인과 간판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낮이 물러가고 밤이 다가올수록 모기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사인 이기라도 하듯 우리는 서둘러 돗자리를 걷었다.


  건너편 월미도에 대형 관람차가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을 켜고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건너편에서 구읍뱃터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비탈길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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