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안녕, 어쩌면 영원히

브라질에서 마시는 커피 이야기 com 그림일기

by 초록풀잎



남편의 첫 번 째 발령으로 브라질에서 지내던

2013년의 어느 날,

이웃 언니가 커피 한 잔 하러 오라고 했다.

가보니 식탁에 과일과 쿠키 그리고 예쁜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언니가 말했다.


"나 커피 머신 샀거든. 커피 어떤 거 마실래? 골라봐"


언니 말을 듣고 커피를 고르러 가보니 색 색깔 예쁘고 다양한 커피 캡슐이 한가득 있었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 그냥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골랐다.

보라색 '아르페지오'. 왠지 이름도 맘에 들었다.


크레마가 가득한 커피, 향도 좋았다. 한 모금 마셔보니 쓴 맛이 강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기서 파는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이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다들 샀다고 했다. 같이 초대받은 친구와 함께 그 길로 쇼핑몰에 갔다.


한국에서 당시 30만 원 대였던 커피머신이 이곳에서는 15만 원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국에서 캡슐이 다른 나라보다 비싸게 팔리던 때라 캡슐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색 색깔의 캡슐 박스를 보며, 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진열되어 있는 커피 캡슐의 디자인에 반했던 것 같다.

그렇게 끌리듯 결제를 했고, 머신 첫 구입 시에만 구입할 수 있다는 패키지까지 구입했다.

그 패키지는 캡슐 250개를 한 번에 구입하면 캡슐 보관함을 선물로 주는 패키지였다. 아직 어떤 캡슐이 맛있는지 모르니까 다양한 종류의 캡슐을 맛보고 이후에는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하면 되니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했다.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을 구입하기 전에는 커피를 주로 핸드드립으로 내려 마셨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맛을 구분하는 세심한 입맛도 아니어서 내가 내린 커피가 나는 그저 맛있었다.

그런데 커피머신을 들인 이후, 드립 커피가 맛이 없어졌다. 캡슐 커피를 내렸을 때 노랗게 피어오르는 크레마 때문일까. 캡슐 커피가 훨씬 맛있었다.


그렇게 나는 '브라질'에서,

커피의 나라 '브라질'에서

2년 동안 네스프레소 캡슐로 커피를 마셨다.


브라질 커피 농장 풍경


2015년,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나의 네스프레소 사랑은 계속됐다. 그 사이 네스프레소의 가격이 내려가서인가, 아니면 조지 클루니를 내세운 광고의 효과인가 주변 사람들이 다들 집에서 네스프레소 커피를 마셨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는 내가 원하는 캡슐을 청해 마시기도 하고, 친구들과 서로 어떤 캡슐을 좋아하는지, 각자의 취향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느새 네스프레소로 커피의 취향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네스프레소가 보편화된 것 같았다.


올해, 남편의 두 번째 발령으로 다시 브라질로의 이사를 준비하게 됐다.

나는 컨테이너에 싣고 가는 이삿짐이 아닌, 내가 비행기 탈 때 가져가는 짐에 커피 머신을 넣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해외에서 가수들이 버스킹을 하는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에서 가수 윤건이 해외 촬영 길에 커피머신을 챙기면서 뒷부분 물통을 챙기지 않아 막상 도착해서 커피를 못 마시게 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윤건은 길지 않은 촬영을 가면서도 머신을 챙기는데, 나는 이삿짐 오기 전까지 최소 3개월은 지내야 하니까 머신을 가져가면 좋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짐을 싸다 보니 그게 사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가져갈 짐이 산더미인데 부피도 있고, 포장도 꼼꼼히 해야 하는 머신을 챙겨가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가끔 사용하던 드리퍼를 챙겼다. 이삿짐이 올 때까지 커피를 사서 이 드리퍼로 버텨 볼 예정이었다.

브라질에 도착해 처음 마트에 간 날, 마트 매대에 가득 한 커피들 중 하나를 골라 커피를 내려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캡슐커피보다 어딘가 모르게 별로 인 것 같았다. 크레마도 없고, 향도 나랑 안 맞는 것 같고, 빨리 이삿짐 속 내 머신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한 격리 때문에 이사는 미뤄지고, 나는 계속 드립 커피를 마셔야 했다.


그런데 어느새 이 맛에 익숙해진 건지, 드립 커피 맛이 좋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커피가 직접 생산되는 생산지가 있는 나라여서 인지 커피의 향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마트의 커피 코너를 주의 깊게 살폈다.


브라질에는 워낙 커피 브랜드가 다양하고 가격대도 다양한데, 이곳에도 네스프레소 머신의 보급률을 반영하듯 모든 브랜드에서 네스프레소 머신용 캡슐커피를 생산하고 있었다.

다양한 커피들

볶은 원두를 갈고 난 후 포장해서 판매되는 커피는 250g에 원화로 약 2500원~7500원 선이다. 그런데 캡슐커피는 10개 들이 한 통에 브랜드에 상관없이 대체로 5000원 정도 한다.

250g 커피를 하나 사면 하루에 두 잔씩 꾸준히 마셔도 한 달은 너끈히 마실 수 있음을 생각하면 캡슐 커피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브랜드의 드립 Vs 가격차이

게다가 매대 한 벽을 커피로만 다 채울 정도로 커피 수요가 많은 이 나라에서, 그래서 똑같이 볶은 후 갈아서 파는 커피라도 그 어느 나라보다 신선할 것 같은 이 나라에서, 캡슐커피를 선택한다는 건 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전문점에 가서 갓 볶은 커피를 갈아달라고 해서 받아와도 1만 원이 안 되는, 커피가 저렴한 이 나라에서 말이다.


그래서 결국, 컨테이너 이삿짐에 섞여 온 커피머신은 요즘 쉬고 있는 중이다.



대신 이삿짐에 들어있던, 오래 잊고 있던 '비알레띠'가 떠올랐다. '비알레띠'는 브라질만큼이나 커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유명 아날로그 커피메이커다.

아래쪽에 물을 담고, 그 위에 커피 가루를 넣고, 가스레인지에 끓이면 아래쪽의 물이 증발하면서 위쪽에 커피가 채워지는 방식인데 비알레띠의 장점은 계량이 쉽다는 것에 있다.

내 비알레띠는 2인용이라 여기에 물과 커피를 가득 담으면 에스프레소 2잔 분량의 커피가 나온다. 그래서 여기에 커피를 내리면(올리면?) 좀 더 나은 커피를 맛볼 수 있다. 나의 핸드드립은 항상 물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이 쪽이 좀 더 쉬운 것 같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준비할 때마다 나는 의식처럼 커피 봉투를 열어 향을 맡는다.

어쩌면 커피의 맛보다 향이 더 나를 설레게 하는 것 같다.


커피의 향을 맡고, 드리퍼에 커피를 담고, 뜨거운 물을 붓는 그 과정에서 나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설렘을 누린다. 비알레띠에 커피가 끓어오를 때 나는 향도, 나의 핸드드립으로 커피가 젖어갈 때 나는 향도 좋다.


요즘에는 커피를 브랜드별로, 원산지 별로 다양하게 사다 놓고 매일매일 다른 커피를 마셔보는 재미에 빠져있다. 나의 들쭉날쭉한 드립 솜씨 때문에 같은 커피도 다른 느낌이 날 때가 있지만 그것도 괜찮다. 여차하면 비알레띠가 있으니까.

마트에 가서 어떤 커피를 골라볼까 고민하는 재미도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저 수많은 종류의 커피를 다 마셔봐야지. 유명하다는 커피숍도 다 다녀봐야지.


적어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커피머신이랑 헤어져봐야겠다.


잠시만 안녕, 어쩌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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