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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둘셋 Oct 21. 2023

4. 양육자 택씨

그래서 택씨는 어떤 아빠였을까?

 지금까지 택씨에 대한 기억들을 쭉 함께 읽어온 독자라면 택씨는 낭만적이고 유머러스한 데다가 요리까지 잘하는 약간의 유니콘 재질을 지닌 아빠라고 생각할 것이다. 친구 같이 편안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재미있는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 떠오르겠지. 하지만 모든 인간의 성격은 입체적이고 역할에 따라 다른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내가 20살이 되기 전까지의 택씨는 어마무시하게 무서운 아빠였다.


 그의 위세가 어떠하였는지 한 가지 일화를 이야기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때에 걸스카우트에서 제주도 여행을 간다며 안내문을 나눠주었다. 부모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나는 아빠한테 가고 싶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혼자서 아빠의 퇴근시간까지 아빠 얼굴을 마주하는 상상을 하며 "여행 보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시뮬레이션했다. 그러나 퇴근하고 돌아온 택씨를 보자마자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고, 울지 말고 말해보라는 아빠의 다그침이 무색하게 엉엉 울며

 "여행..제주도...가고....싶...어혀...친구들이...같...이.. 가자고...흑...."

 라고 토해내듯 말하며 끅끅댔던 것이다. 택씨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짜고짜 못하게 어깃장을 놓는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그냥 택씨와 마주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어린 나의 눈에 택씨는 무섭고, 논리적이고, 엄하고, 나를 혼내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택씨를 어려워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내가 그의 화가 나는 포인트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점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에게 호되게 혼이 났었던 것이다. 8살의 기억을 꺼내보자면, 당시에는 소독차라는 것이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매캐한 냄새가 나는(그러나 조금은 매력적인) 흰 연기를 골목 가득 뿌리고 다녔었다. 우리 동네 소독차는 큰 트럭 뒤에 연기가 나는 장비를 돌리며 천천히 우리 집 앞부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한 바퀴 빙 둘러 나갔는데, 당연히 그 시간에는 온 동네 아이들이 나와 그들만의 파티를 즐겼다. 소독차 소리가 '웅~'하고 날 때부터 그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연기 속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약간은 몽환적인 기분을 느끼며 깍깍 거리는 것은 어린이라면 참을 수 없는 하나의 일과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 역시도 그날 '웅~'소리가 들리자마자 대문을 뛰어나가 저 앞의 피아노 학원을 지나치는 소독차를 쫓아 냅다 달렸더랬다. 누가 크게 부르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어렴풋이 택씨의 실루엣이 보였다. 택씨는 연신 나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지만, 사실 잘 들리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한참을 소독차를 따라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큰방에서 택씨와 단 둘이 마주 앉아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아빠가 가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 들었어, 못 들었어?"

 "... 못 들었어요.."

 "아빠랑 눈 마주쳤을 때, 아빠가 손짓하는 거 봤어, 못 봤어?"

 "...잘 못봤어요..."

 "평소에도 이렇게 소독차 오면 뒤에 붙어서 달려가?"

 "...네...."

 그 뒤로 달려가는 소독차를 따라가면 왜 안되는지에 대한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지금 8살이 된 내 아들이 소독차를 따라간다고 하면 나도 당연히 앉혀놓고 혼내겠지만 그때에는 그게 왜 그렇게 억울했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소독차를 처음 따라간 것도 아니었고 엄마는 맨날 따라가도 한 번도 안 혼냈는데! 나 말고 동네 친구들도 다 따라 나오는데 걔들은 집에서 안 혼나는 것 같은데! 나는 택씨의 소리를 못 알아들어서 그런 거지 잘 들렸으면 말을 들었을 텐데!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혼나고 손바닥을 맞아야 하는지(내 기억으로는 그날 택씨에게 처음으로 맞았다.) 알지 못했지만, 그다음부터는 확실히 소독차 소리가 들려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한번 더 소독차를 따라가다 택씨에게 걸린다면, 더 무서운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더는 맞을 짓을 하지 않고 얌전히 잘 지내던 어느 날, 내가 4학년이 되었을 때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진다. 그날은 내가 잠을 자려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셋이 자꾸만 둘과 나의 위로 굴러다니며 잠이 드는 것을 방해했었다.

 "셋아, 이제 자야 하니까 하지 마."

 "응, 언니. 히히히"

 하지만 신이 난 셋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 다니며 굴러다녔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셋을 말리다 포기하고는 우리 모두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오여사는 우리를 재우려 했는지 말리려 했는지 어땠는지 나의 기억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꽤 오래 잠자리에서 소란을 피웠고, 그 소란은 택씨의 귀가 소리에 정리가 되었다.


 택씨가 귀가했다. 우리는 생각했다.

 '아빠가 돌아오셨으니 나가서 인사를 해야지!'

 그냥 자는 척을 할걸 이제 와서 후회를 하지만, 얼마나 착하고 예의 바른 딸들의 모습인가! 우리는 후다닥 현관으로 나가 씩씩하게(그리고 너무 쌩쌩하게) "아빠 다녀오셨어요?"인사를 했고, 택씨는 별안간 화를 내며 우리 모두를 방 안에 차례로 앉혔다(고 쓰고 무릎을 꿇렸다고 읽는다.).

 "누가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장난치고 있었어?"

 택씨는 나에게 물었다.

 "저랑 둘이 자려고 하는데, 셋이 자꾸 우리 위를 돌아다녀서 잠을 못 잤어요."

 "너는 왜 안 자고 장난치고 있었어?"

 택씨가 둘에게 물었다.

 "제가 자려고 했는데, 셋이 언니랑 저 위를 굴러다녀서 못 잤어요."

 "너는 왜 안 자고 장난쳤어?"

 택씨가 셋에게 물었다.

 "..제가 언니들 위를 굴러다녀서 언니들이 잠을 못 잤어요."

 "너는 참으로 정직하구나. 셋은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첫이랑 둘은 엎드려. 엄마, 매 가져오세요."


 다소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아니, 정말로, 아니, 진짜로 나랑 둘은 자려고 누워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잠을 못 자게 된 것은 순전히 셋의 장난 때문이었다. 하지만 택씨는 이상한 포인트에서 나와 둘에게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언니들이 되어가지고 동생에게 잘못을 덮어씌운다'는 죄명으로 나는 그날 밤 우리 집에 존재는 했지만 한 번도 맞아본 적 없었던 감나무 매로 엉덩이를 맞았다. 더 열받는 점은 이 날 맞은 사람은 나뿐이었다는 거였는데, 분명 내가 맞을 때까지는 내 옆에서 잘 엎드려뻗쳐 있던 둘이 갑자기 자기 차례가 되자 구석으로 도망가 택씨에게 빌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빠,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라고 하며 둘은 택씨를 피해 숑숑 도망 다니며 손바닥을 싹싹 빌기 시작했고, 아무래도 동생을 잡으러 다니는 것은 지금까지의 무드를 유지하기에는 흉측했는지 택씨는

 "너 안 올 때까지 언니가 대신 맞는다."

 라는 무서운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실천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도 둘처럼 싹싹 빌 생각은 못했던, 내가 나이가 어리지 가오가 없냐, 고 생각하며 매를 다 맞아낸 K-장녀 되시겠다.


 그날 나는 우리 모두에게 실망했다. 애초에 우리 사이를 굴러다니며 잠을 방해한 셋에게도 화가 났고, 언니가 맞고 있는데도 끝까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간 둘에게도 참을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거기다가 나는 보호(?)해주지 않고 둘만 감싸준 오여사도 미웠고, 정직한 나에게 매를 든 택씨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택씨는 상황이 정리되고 곧장 날 안아주며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내가 거절할 수도 없는 사과라니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 이 모든 상황이! 아,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는 아동학대나 뭐 그런 비슷한 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 우리가 자라던 90년대에는 다들 맞으면서 자랐고, 내가 택씨에게 맞은 기억은 저 두 개가 끝이다. 심지어 둘과 셋은 이 날을 무사히 넘김으로써 맞은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게다가 웃긴 점은 이 글을 기획할 때만 해도 '난 여전히 택씨의 화가 난 포인트를 모르겠어. 택씨는 날 왜 때린 걸까?'가 주된 감정이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택씨가 이해가 돼버린 것이다. 이게 아이를 낳아보고 길러보니 그 상황이 이제 부모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구나. 아마도 우리가 서로 장난치느라 잠을 늦게까지 안 잤던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리라. 나는 딱 저 날만 기억하고 있지만 개구쟁이 세 딸을 재우는 것은 오여사로서는 매우 힘든 육아의 마지막 과정이었을 테고, 아이들 재우는 것의 어려움을 택씨에게 토로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택씨의 화가 난 모습이 조금은 이해된다. 택씨는 우리에게 늘 잠자리에서 장난치는 이유에 대해 물었는데, 나와 둘 모두 냅다 셋 탓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택씨는 그간 오여사에게 전해만 듣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것일 테고, 벼르고 벼르다 오늘은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택씨에게 매를 맞으면서까지 혼난 것은 딱 저 두 가지 사건뿐이었는데, 늘 이해가 안 되었어서 자라는 내내 택씨가 너무 무서웠는데, 언제 갑자기 혼이 날지 몰라 늘 알아서 잘하게 되었었는데, 이게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그리고 다시 곱씹어보니 이해가 돼버리다니! 역시 사람은 역지사지를 잘해야 한다. 내가 애초에 시작한 결론과 너무 다른 글이 되어가고 있음에 당황스럽다.  


 얼마나 택씨가 엄했는지, 내가 K-장녀로서 얼마나 많은 제약을 견뎌냈는지 일일이 열거하려고 했는데 맥이 풀려버렸다. 아빤 다 이유가 있었구나! 를 방금 깨달아버린 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일과 관련해서 성인이 된 후 왜 그렇게 우리한테 무섭게, 엄한 척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택씨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몰랐어. 그리고 우리 집이 딸만 셋이라서 더 엄하게 했던 것도 있고."

 라고 대답했다. 유독 나에게만 엄했던 것에 대해 묻자 오여사는 이렇게 답했다.

 "그때는 큰 놈만 잡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잘 따라온다길래 큰 놈만 잡았지. 그랬더니 나머지는 안 잡히대?"

 그렇다. 그들도 엄마, 아빠가 처음이었고, 나는 그들의 첫 작품이었던 것이다. 다 이해해 버린 지금은, 택씨와 오여사만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나 생각해 본다. 나도 부모가 처음인데 처음이라 서툰 것들을 나중에 나의 아들들에게 이해받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온다면 나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축하드립니다. 성공하셨네요, 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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