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열정이 있는 인간은 늙지 않는다
30여 년간 관찰한 택씨의 즐거운 몸짓을 볼 수 있는 순간
택씨는 미식가이다. 그리고 보통의 미식가들이 그러하듯 택씨 또한 맛있는 것을 맛보고 또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택씨는 비싼 고급 음식점을 찾아다니기보다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맛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해서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편이다. 그리고 괜찮은 맛이 입력되면 빠른 시일 내에 그것과 비슷한 결과물을 출력해 내어 우리 모두 앞에 내놓는다. 택씨의 요리사전에 신상이 추가되는 것이다.
"아빠가 이번에는 저쪽 요리를 한번 먹어봤는데, 그 동네에서는 이 재료를 이렇게 쓰더라고. 한번 맛봐봐, 어때? 비슷하게 나온 것 같아?"
택씨는 미술 수행평가 결과물을 선생님께 평가받으러 온 학생처럼 딸과 사위, 손자들 앞에서 자신의 제작 의도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며 침을 꼴깍 삼킨다.
"오, 이거 좋은데? 밖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
그러면 택씨는 금방이라도 어깨춤을 출 것 같은 걸음걸이로 주방으로 돌아간다. 메리야스만 입은 뒷모습에서도 뿌듯한 미소가 보인다.
우리 집에는 덕분에 세계 각국의 향신료들이 구비되어 있다. 샤프란이나 페페론치노는 너무 기본적인가? 최근 들어본 신상 향신료는 큐민, 팔각 정도인데 늘 나에게 한번 먹어보라 권하지만, 나는 향만 맡아보고 거절할 때가 많다. 택씨의 입맛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서 밥 먹기 전에 괜히 도전했다가 입을 버리기 싫기 때문이다. 소금, 설탕도 없는 우리 집(나는 거의 생으로 먹거나, 굽거나 볶고 끝일 때가 많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그 흔한 고춧가루도 요리에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노부부 둘이 사는 집에 중국집에서나 쓸 법한 가스레인지 만한 웍이 있다면 믿을 텐가? 그 웍을 샀을 때, 큰 웍을 뭐 할 때 쓸 거냐며 타박했지만 아무래도 제일 큰 수혜자는 나다. 웍이 사용되는 날이면 택씨의 수제 짜장이나 탕수육을 맛볼 수 있으며, 양이 많기 때문에 우리 집에 일주일치 식량이 비축된다. 둘째네 가족이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웍이 빛을 발한다. 손목 관절이 걱정될 만큼의 크기와 양이라 나가서 사 먹자고 뜯어말려도 택씨는 꿈쩍 않는다.
"아빠께 더 맛있다."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그 길고 긴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택씨는 일식조리사 자격증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택씨가 튀겨준 새우튀김보다 더 맛있는 가게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것도 냉동새우로 튀겼다는데 어째서 고급일식집 생새우튀김 맛이 난단 말인가. 친정 근처에 사는 나의 요리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택씨 때문이다. 실력차이가 어지간해야지 배울 엄두가 나는 법이다. 심지어 내가 고등어 구이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내 남편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 고등어구이 잘하는 집 가자. 너희 집. 아빠한테 빨리 전화해."
나도 고등어 구울 줄 아는 사람인데도, 내 남편은 택씨를 먼저 떠올린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다,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중박은 친다는 맛의 고장에 살고 있는 우리지만, 타지 친구들이 지역 맛집을 물어보면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택씨의 요리가 이 구역에서는 제일이기 때문이다.
택씨와 오여사, 그리고 우리 가족(나와 남편, 아들 둘)까지 총 6명이 함께 1박 2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우리 가족은 휴일에는 늘 쉬는 반면 택씨와 오여사는 늘 휴일에만 일을 해서 그간 함께 휴가를 보낸 적이 거의 없는데, 큰맘 먹고 휴가를 맞춰본 것이다. 모두에게 휴식과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꽤 평이 좋은 휴양림을 잡았는데, 막상 휴양림에 도착해 보니 택씨와 오여사가 무지 바빴다.
"아빠, 뭐 해?"
"어? 이제 요리해야지."
택씨가 승용차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기 시작하는데, 아이스 박스가 하나, 홈플러스 장바구니가 둘, 까만 비닐봉지가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오더라. 한참을 짐을 꺼낸 뒤 하나씩 풀어보는데 웬걸, 택씨네 주방을 그대로 옮겨 왔다. 소스가 6개에, 초벌구이를 한 돼지고기에, 간 얼음에, 김치 3종세트에, 부르스타와 프라이팬을 비롯한 각종 조리도구까지.
"아니, 좀 쉬자고 놀러 왔더니 아빠 혼자 강식당 찍어? 이게 다 뭐야?"
"우리 아가들 좋아하는 것 좀 해 먹일려고 가져왔지."
숙소에 입실한 순간부터 3시간 동안 택씨는 메리야스가 다 젖을 때까지 요리만 했다. 그날 그렇게 완성되어 먹은 요리가 동파육(내가 좋아한다고 한번 말했던 청경채도 잔뜩 들어가 있었다.)부터 시작해서 윙버터구이(식용유 아니고 버터입니다.)와 버섯볶음 그리고 후식으로는 남편이 좋아하는 비빔국수(고명으로 상추와 삶은 계란 그리고 토마토가 올라간)였다. 풀 코스도 이런 풀 코스가 없다. 다음날 조식으로는 감바스(바게트 빵도 준비되어 있었다.)가 나오더라. 1박 2일 내내 바깥 한번 나가지 않고 모든 음식을 해서 먹이는 이 아버지의 사랑과 노동이란! 대체 휴식을 하러 온 건지 '택식당'이라도 찍으러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택씨는 매우 뿌듯해하였지만 모두의 힐링을 위해서 다음부터는 조리가 아예 불가능한 호텔로 휴가를 떠나기로 합의를 보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택씨의 요리에는 정성이 있다. 택씨가 누구를 생각하며 그 음식을 만들었는지가 눈에 보인다. 이건 나를 위해서 만들었구나, 이건 우리 아들 먹으라고 이렇게 연하게 조리했구나, 이건 오빠가 좋아하는 맛이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재료를 넣고 맛을 내는 택씨의 음식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쉬는 날엔 하루 종일 멸치 똥을 따다가 어깨가 결려 몸져눕기도 하고, 나이 60부터 김치를 담그기 시작해 야채란 야채는 다 가져다가 김치로 만들어버리는 택씨는, 누가 뭐래도 우리 집의, 아니 이 구역 최고의 요리사이다. 다른 손주들은 할머니 손맛 그리워할 때, 우리 아들들은 할아버지가 해주신 함박스테이크를 그리워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웃기고, 그립고, 슬프다. 택씨의 손목 관절이 오래오래 건재해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메리야스가 흠뻑 젖도록 우릴 위해 음식을 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