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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둘셋 Nov 03. 2023

5.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1번은 늘 떨리고 설레는 법이지

 싸이가 두드리고 BTS가 노 저어준 덕분에 전 세계인이 알게 되어 버린 한국의 모든 것들은 명사 앞에 'K'를 붙이고 위풍당당하게 수출되고 있다. K-pop을 시작으로 K-culture, K-food 등등 K만 붙어도 Korea가 되는 마법 같은 시대이다. 단순한 콘텐츠를 넘어 대한민국의 모든 것들이 하나의 문화로써 확산되는 이때에, 웃지 못하는 그룹이 있었으니 바로 'K-장녀'들이다.


 K-장녀들은 사실 이 단어가 있기 전부터 커뮤니티를 이루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비공식 활동명은 '동생 걱정하는 장녀들의 모임'이었다. 그곳에 가면 답도 없는, 소위 노답인 동생들의 인생을 걱정하며, 또 그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타는 속을 걱정하며, 온 집안의 걱정을 걱정하는 장녀들의 걱정 배틀을 들을 수 있었다. 다들 카드게임에서 마지막 패를 꺼내듯 자기 집안 얘기를 하는데, 늘 마지막은 이런 식이었다.

 "이것들은 내 속을 알라나 몰라."

 "이것들은 언제 철드냐."

 "맨날 우리만 고민하지."

 그렇다. K-장녀들은 특유의 자라난 환경 때문에 굳이 둘째라면, 막내라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집안 걱정들을 마치 자기가 가장인 듯하는 습성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 자연스러운 걱정과 책임감이, 굳이 내가 안 해도 될 관계와 감정들에 대한 고민이, 식사를 마친 후에 자연스레 마시는 물 한 모금처럼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어버린 장녀들은 그래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척척 잘하는, 일찍이 철든 애어른이 된다.


 내가 만난 K-장녀들은 거의 다 이런 성격이었는데('내가 만난' 장녀들로 한정하는 이유는 당연히 세상은 넓고 다양한 반례들이 있으리라. 그렇지만 그런 집에선 꼭 또 이렇게 장녀롤(role)을 하는 차녀가 있더라. 누군가는 해야 하는, 대부분은 장녀가 맡게 되는 롤정도로 생각해 달라.), 인생에서 이러한 책임감과 현실감을 반드시 장착시켜 살아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있는 '장녀'라는 타이틀에서 한 번쯤은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내가 둘째였더라면'으로 시작하는 타령은 일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야만 했던 장녀들의 한 맺힌 소리다. 둘째의 삶을 타박하고 경멸하고 걱정하면서도 마음속 한 구석에는 하루만이라도 저렇게 자유롭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나 또한 내가 장녀라서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부모님의 기대는 늘 나에게만 집중되었고, 그래서 늘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늘 엄격하게 느껴졌으며, 때론 부당하기도 했다. 내가 스스로 잘할 뿐만 아니라 동생들을 잘 관리하기까지 바라는 것 같을 때에는 고작 2살 차이로 엄마 역할의 일부를 내 몫으로 떼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은 26살 차이를 뛰어넘어 엄마의 이런저런, 어린아이가 공감하기엔 다소 난해한 하소연을 애써 수긍하며 들어주는 친구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아이이지만 아이일 수 없었던 숙명을 지닌 장녀들은 자신들의 그런 모습에 뿌듯해하다가도 돌연 망연자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보니 장녀라 좋은 점도 생기더라. 이 또한 내가 부모가 된 이후에나 알 수 있었는데, 내가 첫째를 낳고, 그리고 또 둘째를 낳고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을 30 하고도 몇 년을 더 살고서야 드디어 알게 된 '첫 번째로 태어난 자의 좋은 점'이다. 이걸 찾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내가 삼십몇년을 살고서야 알게 된 삶의 비기를 이렇게 쉽게 공유해도 되나 싶지만, 내 독자님들께만 알려드리겠다.


 나는 잘 때에 양팔에 아들을 한 명씩 끼우고 자는데, 첫째는 벌써 8살, 둘째는 6살이나 되었다. 둘 다 아들들이라 잘 때도 어찌나 파닥거리는지 호흡이 고르게 될 때까지 한참을 부대껴야 잠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알게 된 사실은 8살 큰 아이가, 이미 키가 125cm가 넘어 나와 몇 센티 차이가 안나는 이 아이가 내 팔을 배고 잠이 들 때마다 나는 이 아이를 처음으로 옆에 누이고 재웠던 날을 계속해서 떠올린다는 것이었다. 내 팔 길이보다 짧았던, 수박 한 덩이보다 훨씬 가벼웠던 그 아이를, 이미 10배나 커져버린 아이의 얼굴에서도 나는 쉽게 떠올리고 있었다.


 반면 둘째는 아무래도 기억이 희미하다. 둘째를 낳고 한 1~2년은 사람처럼 살지 못해서인지 거의 아무 기억이 없다. 그냥 내가 하염없이 울던 기억만 있다. 둘째는 그냥 지금 귀엽다. 둘째는 늘 현재의 모습만 보이는데, 첫째에게서는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그날의 그 아이가 계속해서 보인다. 처음으로 태어났을 때의 모습, 처음으로 조리원을 나와 집에 왔을 때의 모습, 처음으로 이유식을 먹던 모습, 처음으로 방바닥을 기던 모습, 처음으로 엄마 비슷한 것을 말하던 모습, 처음으로 걸음을 떼던 모습. 그 모든 모습들이 이미 훌쩍 커버린 첫째의 모습에서도 생생하게 보인다. 첫째의 장점은 이것이다. 내가 내 부모의 모든 처음이라는 것이다. 택씨와 오여사의 모든 첫 순간은, 온통 나로 장식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불현듯 어떤 순간이 떠올랐다.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던 택씨의 모습. 그날 정말 의아했는데, 왜냐면 그때 나는 이미 중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중학생 정도의 내가, 엄마 아빠랑은 이제 막 데면데면해진 내가, 한창 얼굴에는 여드름이 나고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던 시기의 나에게 택씨의 이 손길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간만에 친척집에 가서 다 같이 놀다 잠깐 잠이 들었던 상황이었다. 술을 한 잔 걸친 택씨가 방에 들어왔고 자고 있는 나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선잠이 들었던 나는 택씨가 들어오는 문소리에 잠이 깼지만 어차피 금방 나갈 것이라 생각해서인지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고, 택씨는 그런 나를 정성스레 쓰다듬으면서 "아이고, 예뻐라."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택씨는 나를 깨우지도 않고 한동안 앉아있다 몹시도 아련하게 떠났는데, 딱히 택씨와 많은 교류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던 터라 잠결에도 이상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의 수수께끼가 드디어 풀린 순간이었다. 택씨가 그날 쓰다듬은 나는 아마도, 택씨의 기억에 있는 나의 첫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보아도 처음의 내가 보이는 마법을, 나는 부릴 줄 아니까. 내가 열 살을 먹어도, 스무 살이 되어도, 서른 살이 지나도, 쪼글쪼글 할머니가 되어도, 택씨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나는 이제 알아버렸다. 택씨는 여전히 갓 태어난 나를, 처음으로 아빠라 불러주는 나를, 환하게 미소 짓던 나를, 첫 발걸음을 떼던 나를 보고 있겠지.


 첫째의 장점이란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선명한 처음이 된다는 것. 그래서 늘 새롭고 즐거웠을 것이고, 그래서 늘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이고, 그래서 늘 그들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는 그들의 처음이 된 죄로 앞으로도 수많은 책임감을 지고 살아갈 테지만, 그들의 처음이 될 수 있어 영광이다. 내가 나의 처음을 얼마나 애타게 사랑하는지 알기에, 나의 처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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