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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둘셋 Apr 01. 2024

15. 보고 배운 행복

보통의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 이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터질듯한 젖살, 실룩거리는 엉덩이, 쭈욱 펴도 여전히 머리통보다 조금 긴 정도의 짧은 팔.

 옴뇸뇸하는 입술, 살짝 위를 향한 들창코, 말랑말랑한 뱃살 그리고 왜 아직도 나는지 모르겠는 아기 냄새.

 한국나이로 7세, 어린이집의 제일 큰 형님. 내일모레면 드디어 만 6세가 되는 우리 둘째는 어째서 내 눈에는 한 살 때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 공식 똥강아지(공교롭게도 개띠이다.)인 둘째는 막둥이 역할을 톡톡히 하기 위해서인지 아직도 집에서는 스스로 숟가락을 들지 않으며, 엄마의 무릎이 아니라면 앉지를 않고, 조금만 다쳐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아달라고 떼를 쓴다.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밖에서는 선생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는 FM 학생에 줄넘기, 장구, 율동, 글씨 쓰기 등등 못 하는 것 없는 에이스라고 하니 집에서만큼은 이 빵꾸똥꾸짓을 받아주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나도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척 하지만, 사실은 참을 수 없이 귀여워서 도무지 이 똥강아지를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자기 자식은 엉덩이도, 발가락도 물고 빨고 한다더니, 내가 꼭 그 꼴이다.


 오늘은 저녁식사를 하러 친정에 다녀왔는데, 가는 길에 내가

 "할아버지 집은 2002년에 만들어졌어. 엄청 오래되었지?"

 라고 했더니

 "그럼 그때 나는 어디에 있었어?"

 라고 물었다. 그러게, 그때 너는 어디에 있었을까. 택씨와 오여사의 보살핌 아래에서 19년, 홀로 상경하여 어떻게든 나의 존재를 증명해 내고자 애쓰던 9년, 그리고 나의 아이를 만난 뒤의 9년. 내 삶을 나누자면 크게 이렇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 9년의 삶이 너무 강렬해서 그 전의 시간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것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떤떤이는 2018년생이니까 2002년에는 없었지~"

 "그럼 엄마랑 아빠도 없었어?"

 "아직 만나지도 못했지~"

 태어나기도 이전의 일을 궁금해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궁금해진다. 그러게, 너는 어디에서 왔니?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이가 어떻게 나한테 왔니? 그동안 계속 지켜보며 기다렸니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니? 내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걸 만들 수 있다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정답이 없는 문제의 끝은 대부분 깨달음이라 불리는 말장난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굳이 찾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어차피 답도 없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귀여운 아이를 두고 존재의 의미를 모른다 말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어쩌면 나의 존재의 이유는 이 친구 하나로도 넘치게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친구의 존재의 이유 또한 누구보다 내가 꽉 붙들고 있다. 어디에 가서 누구와 섞여 무엇을 해도 바람에 둥둥 떠다니는 반짝이는 모래 알갱이 같던 나의 20대는 지나갔다. 남 부럽지 않게 웃고, 누구보다 크게 떠들고, 남들만큼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도, 수많은 알갱이 중 하나, 그것도 쉽게 흩날려버리는, 눈 깜짝하며 사라져 버릴 것 같던 나의 존재는 이 작은 아이의 손을 붙들기 위해 나무만큼 커졌다. 단단한 땅에 뿌리 박힌,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자 노력하는, 커다란 나무.


 사는 게 그렇다. 내가 본 것만 알고, 내가 경험한 것만 안다. 나의 할아버지가 미국유학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뭔가 더 대단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진담인지 농담인지도 구분하기도 어려웠던 그 순간이 여전히 기억이 난다.

 "첫아, 너는 똑똑하고 어디 가도 잘할 것 같으니, 할아비가 미국 유학 보내주끄나? 할아비가 너 유학시킬 돈은 있다."

 "아니요,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랑 우리 가족이랑 같이 있을래요. 여기서도 공부 잘할 수 있어요."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당뇨 합병증으로 앞을 못 보던 할아버지는, 곧 고등학생이 되는 내게 스치듯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그때 내가 '네, 할아버지. 보내주세요! 잘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더라면 뭐가 얼마나 더 달라졌을까?


 그렇지만 내가 아는 모든 행복은, 나의 가족 안에 있었다. 어릴 때의 나는 가족을 벗어나서는 평안, 안정, 행복, 희망 등의 감정을 별로 느낀 적이 없다. 유난히 내성적인 성격에 발표를 하고 싶어도 손을 들 용기가 없어 얼굴만 빨개지다 포기했던 나는, 다른 친구와 친해지는 방법을 몰라 일 년 내내 3월 첫 짝꿍과만 친구를 하던 나는, 가족 밖의 세상은 늘 모험이었고 야생이었다. 밖에 나가면 나는 떨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과장되게 나를 부풀리기도 했고, 상대방의 말이 칭찬인지 조롱인지 구분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고, 그렇지만 그마저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치 없는 척을 하는 눈치 빠른 여우 행세를 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고,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나는 너처럼 밝은 애는 처음 봐."라는 칭찬을 심심치 않게 듣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집에서는 그저 침대에 피어있는 곰팡이로 존재해도 괜찮았다. 우리 집의 모든 구성원들은 곰팡이인 나를 사랑해 줬다. 택씨와 오여사는 나를,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다. 곰팡이라고 부르면서도 때 되면 먹이고, 너무 오래 눌어 있으면 데리고 나가고, 좀 더 칙칙해 보이는 날에는 새 옷을 사 입히고. 내가 흰 곰팡이인지, 까만곰팡이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런 내게 가족 밖의 어느 곳에서 낙원을 찾을 수 있다 한들, 찾으러 갈 이유가 있었을까.


 내가 중학생이 되고 오여사가 택씨의 사업장에 경리 역할을 맡아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택씨와 오여사는 24시간을 붙어있었다. 나는 세상 모든 부부들은 보통 그 정도를 붙어있는 줄 알았다. 출근도 같이하고 퇴근도 같이 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었을 텐데도 저녁을 먹을 때면 또 대화를 했다. 주중 내내 붙어있었을 텐데도 주말이면 둘이서 드라이브를 갔다. 택씨의 행복은 오여사였고, 오여사의 행복은 택씨 같았다. 나는 사실 이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결혼할 시기가 임박했을 때 내가 찾는 남자의 조건은 명료했다.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을 것, 야망이 적을 것, 나만 사랑할 것. 야망이 있는 수많은 남자들에게서 그들의 1번은 절대로 내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내 눈에 택씨의 1번은 늘 오여사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돈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 집이 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일가는 부자였다면 돈이 주는 여분의 행복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고 살았겠지만, 때마침 망한 덕분에 돈이 있든지 없든지 나의 행복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돈은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니, 거기에서 답을 찾으려 다간 평생 문제나 풀고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김밥과 떡볶이다.(내 남편은 데이트할 때 김밥이랑 떡볶이만 먹던 내가 사회초년생인 자신을 배려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줄 알고 고마웠다고 한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하고도 김밥집만 찾아다니는 나를 보며 컨셉이 아니라 캐릭터임을 확신했다고.)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후대에 전승시킨다. 택씨와 오여사에게서 반반 물려받은 유전자 외에도 나는 그들이 행복한 순간, 편안한 순간, 즐거운 순간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의 행복과 평안과 즐거움에 대입해 본다. 나의 똥강아지는 시도 때도 없이 눈, 코, 입, 볼, 배꼽, 엉덩이에 입을 맞추던 나를 기억할 것이다. 나에게 오여사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주는 방법을, 느끼는 방법을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의 유전자는, 존재는, 행복은, 조금씩은 다른 모습으로, 그러나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다음 세대에도 반복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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