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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둘셋 Oct 15. 2023

0. 아빠, 택씨(프롤로그)

내가 아는 아빠에 관한 기억들

 "아빠가 죽으면 장례식 대신 파티를 해줘."

 "걱정 말아. 아빠 기일에는 온 가족 다 모아서 체육대회도 할 테니까."


 유머러스한 낭만파 택씨는 늘 이렇게 진담과 농담을 섞어 말한다. 어릴 때에는 그의 말이 진담인지 허풍인지 구분하지 못해 여러 번 망신을 당했더랬다. 진안 마이산에 있는 커다란 돌 탑을 택씨가 쌓았다고 하질 않나,  집 근처에 있던 공장의 커다란 철탑을 택씨 혼자서 만들었다고 하질 않나. 순진했던 나는 그걸 또 반 친구들에게 고대로 말하고선 가끔 뜬금없는 거짓 루머를 양산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입담을 똑 닮은 나는, 근 30년간 쌓아 올린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의 말이 얼마만큼의 진심을 담았는지 구분하고 똑같이 받아칠 줄 아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우리의 대화 패턴은 늘 진심 24%에 허세 36% 그리고 답도 없는 웃음 40% 정도로 흘러간다. 나중에는 서로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고 웃고 떠들다가, 이제 밥 먹자, 아니 지금까지 먹은 건 밥 아니고 뭐였대?, 지금까지 에피타이저였어, 난 다 먹었으니까 간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죽으면 장례식 대신 파티를 해달라던 부탁은, 제법 나를 또 헷갈리게 했다. 아들 없이 딸만 셋인 집의 장녀로서 택씨의 장례식은 나의 몫이라는 일종의 책임감과 함께 어쩌면 그의 음유시인 같은 삶의 마무리로써 꽤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비공식 지인한정 파티플래너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나는 나름 그날의 컨셉과 분위기를 상상해 보며, 택씨가 이 정도면 만족할까를 궁금해하며, 혼자 뜬구름을 열심히 채집하고 있었더랬다.


 그러던 중 시할머니의 부고소식을 듣고 어른이 된 이후에(인간적으로 대학생까지는 애기로 치는 게 맞다.) 처음으로 2박 3일간의 장례에 참여하게 되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가족들, 오랜만에 만나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들, 가끔 취해 소리 지르는 문상객과 예를 갖춰 방문하는 수많은 할머니의 생전 지인들. 정말이지 사돈의 팔촌까지 다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할머니와의 관계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고인의 마지막을 기리는 일은 이거야 말로 보통 행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친구들의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 몇 번 성황리에 마무리한 것이 파티플래너 경력의 전부인 내가, 어찌 보면 결혼식보다 더 큰 행사인 장례식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마지막 발인 날, 시할머니를 보내드리며 온 가족이 추모식을 하는데 시할머니의 삶이 A4용지 한 장에 빼곡히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의 시할머니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 살아온 생을, 어쩌면 손자며느리인 나는 절대 몰랐을 그녀의 삶의 자취들로 가득한 그 한 장의 기록을 보며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그녀를, 그녀의 삶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택씨의 허풍 같은 한 마디와 나의 최근의 경험이 더해져 점점 진심으로 빚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의 첫째 딸로서 그를 열심히 기억해 내 기록할 것이며, 택씨의 친구들, 택씨의 형제들, 택씨의 동료들은 몰랐을 아빠로서 그의 삶을 내게 보이는 면으로 가득히 조명해 낼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은 그의 마지막 파티 현장에서 그를 더욱 신나게 추모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택씨의 친구들은 노안으로 인해 눈이 잘 보이지 않을 테니 엄청 커다란 폰트로 출력하여 돋보기와 함께 제공할 예정이다. 이 글이 그들에게 아빠, 택씨를 새롭게 발견하고, 택씨의 삶을 입체적으로 상상해 보는 소소하고 즐거운 기회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택씨에게는 큰 선물이 될 예정이다. 매 해 생일이 서프라이징하고 엘레강스하고 남 부러울 것 없으며 특별하길 바라는 오여사와는 다르게 택씨는 이벤트에는 그닥 감흥이 없다. '매일매일을 특별하게 생각하면 일 년 365일이 내 생일이다.'를 외치는 쪽의 감성을 지닌 그에게 하루뿐인 휘황찬란한 이벤트는 오히려 감점 요소인지라 늘 소소히 케이크만 불고 지나갔었다. 잔뜩 힘주고 머리 세우는 엄마의 생일파티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아빠의 생일파티는 안 그래도 내 마음의 커다란 손거스러미 같았다. 게다가 엄마 생일은 겨울, 아빠 생일은 여름이라 똑같은 옷을 사도 엄마 것이 더 비싸고, 신발을 사도 엄마 것이 더 비싸니 이 불공정함을 해결할 방도가 없지 뭔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에 관한 나의 기억을 선사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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