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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붕 Apr 29. 2024

희망은 언제나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온다.

동생 - 1

계약직인 나는 불안정한 미래로 가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잠시동안 돈이 필요해서 다니는 것뿐이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내가 쌓아가는 하루하루로

내가 바라는 그 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난 멈추지 못할 것 같다.

희망이란 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난 이미 지켜봤으니까.


내가 6살 때 동생이 태어났다.

엄마가 나에게 곧 동생이 생길 거라는

말을 했을 때 정말 기뻤다.

혼자서는 외로웠기 때문이다.

집에서 벽과 대화를 하거나 혼자서

장난감들과 중얼거리며 놀기 일쑤였는데

동생이 생기다니!

동생과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자장가도 불러주고,

엄마 배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난 이때부터 괴롭힘에 대한

이해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뒤에

우린 이사를 했다.

아빠의 일이 이동하는 직업이기도 해서

이사하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유치원 선생님의

괴롭힘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은 나를 유난히 싫어하셨다.

수학문제 푸는 속도가 느려서 맞거나

교실에서 쫓겨났고,

선생님은 애들 앞에서 내가 푼 문제를

보여주며 망신을 줬다.

또 어떤 날은 글씨가 이쁘지 않다며,

원래 1시~2시쯤에 끝났어야 할 수업을

나만 남겨서 3~4시에 끝내, 집으로 보냈다.

선생님의 그런 태도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나를 친구들도 만만하게 봤는지,

물건을 뺏거나 대화를 피하거나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귀에 대고 크게

소리 지른 여자애 때문에 하루 종일

귀가 좋지 않았었다.

선생님은 엄마한테

"(슈붕)이 친구가 장난으로 귀에다가

소리를 질렀는데, 일단 괜찮긴 해요.

근데 애가 귀를 좀 아파하네요."

라고 했다고 했다.

정시에 집으로 온 나는

귀에서 이미 피가 나고 있었고,

집에서도 계속 귀에 대한 통증을

호소했다고 한다.

엄마는 깜짝 놀라,

근처 이비인후과에 갔다.

진단결과, 고막이 찢어졌다고 했다.

덕분에 병원신세를 졌었다.


물론 지금은 완치한 지 꽤 됐다.

청력에도 이상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다.

다만 후유증인지는 모르겠지만

말귀가 살짝 어둡다.


우리 엄마도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고,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엄마가 이때까지 몰랐던 이유는

'이걸 말하면 엄마가 더 걱정할 거야.'

라는 생각에 말을 안 하고 숨긴 것도 있지만,

선생님이 교묘하게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잡고 활동하는 체험활동이 있다면

내 손을 손톱으로 찍거나,

엄청 꽉 쥐어서 아프게 하는 형식의

괴롭힘이었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 동생이

태어난다니 너무 좋았다.

동생과 수다를 떨며 같이 논다는 생각은

나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동생을 임신한 엄마는 어느새 시간이 흘러,

출산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날은 내가 감기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나를 두고 동생을 낳는 게

신경 쓰인 엄마가

나를 이모할머니께 잠깐 맡겼다.

분만실에 들어가는 엄마를

아빠와 배웅을 해주고

아빠는 나랑 이모할머니를

댁까지 태워드리고 일하러 갔다.

이모할머니와 같이 밥을 먹고, 놀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이모할머니와 맛있게

저녁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나는 복통을 호소했다.

눈에는 힘이 풀리고, 얼굴은 창백해졌으며,

식은땀이 흘렀다.

이모할머니는 깜짝 놀라,

"아이고 (슈붕)아!! 왜 그래!! 응!?"

이러시면서 나를 안으셨다.

그러다가 버티지 못하고 결국

방구석에 토를 했고,

그렇게 나는 필름이 끊겼다.

어렸을 때의 나는 그게 잠이

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끙끙거리면서 잠깐 눈을 떴을 땐,

아빠가 나를 태우고 병원에 가고 있었다.

엄마가 동생을 낳으러 갔던 그 병원이었다.

시간이 늦어, 그 병원은 빛이 나고 있었다.

'아, 나 병원 가는구나.'

생각하며 다시 차에서 까무룩 잠에 들었다.


또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 천장이었다.

그리고 옆에 아빠랑

이모할머니, 큰아빠가 계셨다.

큰아빠는 나보고 이제 괜찮냐며 물었고,

나는 "네 이제 괜찮아요!"라고 했다.

아마 자고 있는 동안 링거를 맞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다시 멀쩡해진 상태로

아빠랑 친척분들과 같이 있다가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아빠와 같이

엄마를 보러 갔었다.

아빠는 엄마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고생했다는 말을 엄마한테 해줬고,

나는 엄마한테 "많이 더워?"라고 물어본 뒤,

"많이 힘들어?"라고 물어본 것 같다.

식은땀을 흘리는 엄마는

어린 내 눈엔 엄마가 더워서 땀을

흘리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많이 힘들어 보였기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우여곡절 끝에

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동생이 생기고 100일 보다

조금 더 되는 기간 동안

나는 동생의 기저귀도 갈고 어부바도 해주며

정말 문자 그대로 엄마의 육아를 조금 도와줬다.

설거지도 하고 싶다며 솔선수범했을 정도였다.

"이제 '누나'니까"라는 그 울림이 너무 좋았다.

후에 그게 얼마나 무거운 울림이

되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엄마의 친구 중 한 분이 동생을 봤을 때,

"애가 얼굴빛이 안 좋네.. 어디 아픈 거 아냐?"

라며 걱정을 했다고 했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그 다음날

바로 병원에 갔다.

그 며칠 동안 내 동생은 정말 얌전했다.

마치 잘 울지 못하는 것처럼.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심장에 2개의 구멍이 있다는 진단.

엄마는 충격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진단을 해주신 의사가 동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따졌다고 했다.

"왜 아기 받아줄 때 몰랐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아기가 너무 많이 울어서 청진기로

소리가 잘 안 들렸어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동생은 입원을 하게 됐다.

동생은 그 조그만 몸에

자신의 몸만 한 링거를 달고 있었다.

많이 아파 보였다.

동생만큼은 내가 지키고 싶었다.

병문안도 갈 수 있으면 갔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막대한 입원비와 병원비는

우리 엄마와 아빠가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한 달 벌어 100만 원 이상의 돈을

병원에 지불하고, 그 남은 생활비로

유치원 비용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그 어려움은 "더 좋은 거 못 사줘서 미안해.."

라는 말로 돌아왔다.

의사는 우리 엄마와 아빠한테

"완치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수술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수술 생존율은 50%입니다."라며

수술을 권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고민을 하는 우리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꿈도 희망도 안 보이는 상황에도

아득바득 어떻게든 살면

희망이 생긴다는 이런 걸까?

그 이후 엄마와 아빠는 로또를 하나 사게 된다.

그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확률에 걸어보고

싶을 정도로 많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때, 우리 엄마와 아빠는..

로또 3등에 당첨하게 된다.

어린 나는 티브이를 보다가

엄마와 아빠가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함성에 놀란 건 덤.

엄마와 아빠는 당장 그 돈으로

동생의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큰 고민 하나가 해결되자

우리 엄마는 동생의 수술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수술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엄마의 결론이었다.

사실 엄마의 눈엔 동생이 나아지고 있는 게

보였던 게 아닐까.

그렇게 동생은 시간이 지나,

정말 기적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건강하게 퇴원했다.

퇴원하면서 받은 산타인형은

유난히 호기심이 왕성했던 우리 남매에게

분해당하여 지금은 없다.

그렇게 쭈욱 우리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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