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붕 Apr 28. 2024

책임의 무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아버지

오늘 샤워하면서 가장의 무게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달은 듯하다.

남자 친구 작가 생활을 지지하고 동거를

목표로 들어온 직장.

이제 다닌 지 1달 하고도 17일 지났다.

난 지금 정말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다.

공무원과 다투는 건 고사하고

나한테 인수인계를 해주신 분이 최소한의

서류로 처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눈물 날 정도로 힘들다.

사이에 껴있다는 이 불쾌함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겐 너무 벅찼다.

내일 어떻게든 이 일을 해내야 한다.


그러다 문득 아빠의 입장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서 풀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 가족과 소통하고 함께

으쌰으쌰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랑 아빠도 힘든 상황을 같이

겪으며 버텨왔다.

한 번은 아빠가 노조에 가입해

시위를 했을 때,

한 번은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랑 아빠는 과속으로 나를

임신하고 결혼했다.

엄마와 아빠의 나이 25살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 때 엄마는 나를 낳았고,

아빠는 가장이 되었다.

처음엔 엄마도 아빠도 둘 다 엄마, 아빠라는

것을 처음 해봤기에 서툴렀지만

끝까지 책임져줬다.

어렸을 적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아빠가

회식 때문에 늦은 새벽에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우리 (슈붕)이~"라고 부르면서

그 까끌까끌한 수염을 내 볼에 비볐다.

따갑다며 발버둥을 치다가 엄마가 잠에서

깨서 아빠한테 걱정 섞인 잔소리를 했다.

그때의 아빠의 등은 많이

무거웠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아빠는 술도 잘 못했다.

소싯적, 엄마가 흑장미를 해줬을 정도.

술만 마시면 얼굴이 붉어졌다.

그 정도로 술도 못하는 사람이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 엄마 입장에선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아빠는 아마 그때 짧은 위로와

포옹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혼도 겨우 허락받았다고 했다.

둘 다 애를 키울 만한 형편이 못됐기에.

엄마와 아빠도 많이 무서웠을 거라 생각한다.

덜컥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게.

아빠는 내가 자라는 과정에

나를 혼내는 일이 잦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상을 엎었다.

상을 엎은 건 내가 편식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편식이 심한 나한테 화내며

억지로 먹이고,

내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밥상에 토까지 하니까

지켜보던 아빠가 화나서 엎은 것이다.

하나 있는 자식이 그렇게 잘 먹지도 않고,

없는 형편에 돈을 내고 사서 정성스레

요리해 둔걸 고의적으로 안 먹고,

어떻게든 먹여야 하니

억지로 먹였는데 토하고.

어느 부모가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한 번은 할머니 댁에서 온 가족이 같이

잘 때의 일이다.

악몽을 꿔서 새벽에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자던 아빠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나를 끌고 불이 다 꺼진 어두운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놀람과 무서움으로 더 크게 울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진정이 된 나는

그 방에서 나와, 다시 잠에 들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엄마한테 들었을 땐

차라리 속 시원하게 울음으로써 진정하라고

아빠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처음엔 어이가 없었다.

'누가 그러라고 그런 행동을 하냐고....'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아빠도 아빠가 서툴렀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엄마와 아빠의 가정환경도 좋지 않았으며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나를 임신한

사회초년생들이었으니 이런 쪽으로는

많이 서투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는 담배도 피웠었는데,

담배 피우는 아빠옆에 가서 그거 맛있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그 시기에 담배를 끊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직장에 다니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그러다가 갑자기 아기가 생겼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담배연기는 분명

아빠라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가장의

무게였을 거라 생각한다.


아빠는 내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빠한테 혼났던 기억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까.

호통을 들은 어린 나는 그저 울었고,

아빠와의 어색함엔 고개를 돌리며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5년 전부터

서서히 아빠와의 거리감을 줄였다.


내가 대학교 새내기 때 두 번째로 

렌즈를 꼈을 때였다.

렌즈가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고,

자꾸만 이물감이 생겨,

렌즈 뽁뽁이로 렌즈를 빼려고 했다.

그랬는데 렌즈는 빠지지도 않고

내 눈이 당겨 나와, 식겁해서 뽁뽁이를 

눈과 떨어뜨렸던 기억이 있다.

오전 12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바로 준비하라며 

늦은 시간이지만 바로 응급실에 데갔다.

응급실에 가면서도 나는 이런 작은걸로는

응급실 가기에 너무 민망하다고 했지만

아빠는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며

한 소리를 했었다.
아빠 차를 타고 병원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1대 1로.


차 안에선 어색한 정적만이 흘렀다.

아빠가 한 두 마디 꺼내면 대답만 하는 식으로

간간히 적막이 사라질 뿐이었다.

그렇게 짧고도 길게 병원에 갔을 때,

내 눈엔 나만 멀쩡하게 앉아있는

환자처럼 보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맞나..?' 싶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긴 대기가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됐을 때,

의사 선생님은 아빠한테서 상황을 듣더니

식염수를 가져와 내 눈에 뿌렸다.

눈 뒤쪽으로 넘어갔다면

염증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렌즈가 끝까지 안 나오자,

의사 선생님은 불이 꺼진 복도를 지나 

진료실에 불을 켜고 내 눈을 자세히

진찰해 주셨다.

확인해 보니 원래 처음에 낄 때부터

렌즈가 빠져있었고, 내가 렌즈 사용하는 게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한 마디로 말하자면,

렌즈를 그 하루 종일

한쪽만 끼고 다녔던 것이다!

눈에 있는 이물감에 대해서도 여쭤보니

그건 렌즈 때문이 아니라 안구건조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일단 각막에 상처가 있어, 세수할 때 눈에

물 들어가지 않게 3일간

조심해 달라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아빠한테 혼날 줄 알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랬던 내게 아빠는 혼내지는 않고

평소와 같은 말투로

"최소한 네가 바보처럼 보이지 않게 행동해야

남들도 너를 무시하지 않는 거야."라고 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까지 아빠를 무서워하며 혼자서 장벽을

쌓았던 내가 바보 같았다.

아빠가 무섭다며 엄마한테 표현했던 것을

전해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

그때부터 서서히 장벽을

무너뜨려갔던 것 같다.

아빠의 모든 말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연신 "아빠 말 잘 이해했어.

그렇게 살게."라고 했던 것 같다.


이 일을 계기로 풀어진 장벽은 어느새 낮아져,

지금의 난 아빠와 장난도 치고 하하 호호

지낼 수 있게 됐다.

옛날엔 아빠가 호통만 치면 울었는데,

이제는 몸이 살짝 굳는 정도에

그칠 수 있게 됐다.

예전엔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엄마는 과거의 나에게 아빠도 널 사랑한다며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고 그랬지만

어쩔 수 없이 무서웠었다.

물론 지금도 무서움은 남아있되,

그 밑에 이해가 깔려있으니

전보다 무섭진 않았다.

이젠 오히려 사회생활에 대한 조언을

엄마와 아빠한테서 듣고,

상담까지 하는 상황이다.


엄마와 아빠가 책임을 져주지 않았
지금의 난 없었을걸 알기에. 

오늘따라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 된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