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두터운 베란다 커튼을 젖힌다. 스르르 눈앞에 펼쳐진 창밖 세상은 마법이 풀려난 듯 온통 새하얀 별천지다. 밤사이 풀어져 있던 나른함이 찬기운에 저만치 물러가고 생기를 찾은 눈은 경이로운 세상을만난다. 나목은 제 모습 그대로 서 있지만 빈 공간은 예외 없이 눈이 점령해 버린 새하얀 세상이다.
하늘마저 차지해 버린 눈의 병사들이 마치
흰나비가 나풀거리듯 춤을 추며 공중에가득하다.
바람이 잠을 자는 조용한 세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눈의 낙화는 얼근하게 취한 한량의 걸음걸이처럼 여유를 품고 정처 없이 이리저리 자유롭게 흩날린다.
매혹이 넘쳐나는 동화 속 세상!
눈이 쌓여 깨끗해진 세상 위로 조용히 눈 내리는 풍경은 왜 이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순백이 선사하는 정결함인가.
신나게 놀다 더러워진 개구쟁이를 물로 뽀드득 씻어서 깨끗해진 아이의 반짝이는 얼굴처럼 새하얀 눈이 더러워진 세상을 씻어낸 듯 후련함과 홀가분함이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눈에 담긴 저마다의 즐거운 사연과 기억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팝콘 터지듯 하나 둘 톡톡 터져 나와 우리를 동심이 넘쳐나는 그 시절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시골이 아닌 대도시에서 태어났지만 내게도 눈과 관련된 즐거운 추억이 적잖게 있다.
도시 외곽에 살아 집 근처에 산을 감도는 긴 도로가 있었다. 눈이 폭신하게 쌓이면 대나무로 스키를 만든다. 가능한 한 두께가 있는 대나무를 골라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반으로 가른다. 그리고 대나무의 끝 부분을 연탄불에 그을린 다음 구부리면 스키 비슷한 모양새가 갖춰진다. 그런 뒤, 만든 대나무 스키를 안고 산마루에 올라 도로를 타고 내려온다. 질주하는 짜릿한 느낌은 스키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차가 다닐 수 없는 눈 쌓인 도로는 온통 우리들의 차지가 되었다. 온종일 타다 눈에 젖어 손과 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질 즈음, 집에 돌아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젖어버린 옷으로 혼나는 일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도로에 있는 눈이 녹아버리면 비탈진 응달에는 여전히 눈이 남아 있었다. 지금처럼 눈썰매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 당시에는 비료포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포대를 하나씩 둘러메고 위로 올라가 타고 내려오면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타다 엎어져서 눈에 얼굴을 파묻히기도 하고 중간에 돌이 튀어나와 엉덩이에 불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놀다 지치면 저마다 손으로 눈을 뭉친 다음 살살 굴리며 눈뭉치를 만들었다. 살짝 녹은 눈은 쉽게 뭉쳐진다. 굴리다 보면 점점 커진다. 커지는 만큼 비례해서 가속도가 붙고 혼자 힘으로 굴리기 버거워진다. 그렇게 큼지막하게 하나를 만든 다음, 좀 더 작게 하나를 더 만들어 눈 사람을 만든다. 나뭇가지나 숯으로 눈, 코, 잎을 만들고 나면 완성! 해냈다는 뿌듯함이 큰 자부심이었다. 정이 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창조물에 모자와 머플러를 씌워주기도 했다. 볼 때마다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개중에 심술궂은 아이들이 있어 눈사람을 부셔놓는 일도 있었다. 그런 때는 처음에 속이 상하다가 언제 그랬나 싶게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눈싸움도 빼놓을 수 없는 눈 오는 날의 놀이다. 햇빛을 받지 않은 눈은 잘 뭉쳐지지 않아 놀기가 어렵다. 하지만 햇살에 살짝 녹고 나면 그때는 눈뭉치가 곧바로 만들어져 아주 치열하게 공방전이 되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시작하지만 놀다가 정통으로 얼굴을 맞게 되면 똑같이 되갚아 줘야 하기에 열정에 불꽃이 핀다. 결국 놀이가 싸움으로 번진다. " 너와 다시는 안 놀아!" 외쳐대지만 그뿐, 시간이 지나면 금방 헤헤거리며 다시 어울려 놀았다. 심술궂은 아이들은 끝까지 쫓아와 옷 속으로 눈을 밀어 넣기도 했는데, 그 섬뜩한 촉감이란! 상상해 보니 지금도 오금이 저려 오는 것 같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아련한 추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사실, 지금은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를 들으면 교통체증과 빙판사고가 먼저 떠오르고 염려가 된다. 이제는 낙마사고를 두려워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동심에 젖을 수 있음은 마음은 여전히 풋풋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마음까지 따라서 노쇠해 가는 것은 싫다. 이제는 백세시대, 체력도 관리여하에 따라 큰 차이가 벌어진다. 애 늙은이가 되기도 하고 만년 청춘으로 살 수도 있다.
꾸준하게 운동을 통해 몸을 다지고 경이와 호기심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신선한 물이 늘 공급되는 열린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