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월 1일 삼일절이다. 아파트 안내방송에 국기를 게양하자는 소리에 태극기를 찾았다. 오랜만에 태극기를 보고 만지는 느낌이 새롭다. 베란다 창을 열고 깃대에 국기를 건다. 흐린 날이어서인지 아침인데도 어둑어둑해서 마치 저녁 무렵 같다. 바람이 불어 태극기가 세차게 휘날린다. 아파트 건너편에 의외로 태극기를 단 집이 드물다. 그만큼 삼일절 정신이 퇴색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꾸물거리는 잿빛 하늘처럼 씁쓸한 마음이 인다.
104년 전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이제는 안타깝게도 잊힌 전설이 되고 있다. 과거를 잊고 사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겠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기에 느긋한 하루를 보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반납기한이 경과가 되어 반납도 할 겸 운동도 할 요량으로 아내와 늦은 산책을 나섰다. 밤거미가 내려앉아 조명이 하나 둘 켜지며 어두워 가는 세상을 밝힌다. 불빛이 따스한 느낌을 전한다. 보기와는 다르게 찬바람이 불어 생각보다 추워서 몸이 움츠러든다. 괜히 나왔나 후회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함께한 아내의 발걸음을 따라 걸으니 금방 잊게 된다.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책을 반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재촉하듯이 이야기를 하니 신경이 거슬린다. 마뜩잖아서 산책도 나가기 싫은 마음이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일들이 적지 않았다. 아직도 내게는 십 대의 반항 심리가 남아있는 걸까?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하게 되는데 아내가 하라고 하면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린다. 그에 따라 기분도 덩달아 좋지 않다.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우습기조차 하다. 하지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음을 어쩌랴! 아내도 그런 나를 보며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때로는 웃으며 지나친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참 마음이 넓은 사람이 분명하다.
아내는 집 근처에 있는 한예종에 가기를 원했다. 얼마 전에 그곳을 다녀왔는데 매화가 꽃망울을 가지마다 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꽃이 피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원래 아내는 꽃이나 식물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남편과 같이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접하게 되니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부가 살면서 닮아간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아내는 나를 만나 자신의 삶이 풍성해졌다고 한다. 평소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아서 보고 느끼는 일들을 언제나 아내에게 들려주니 처음에는 무덤덤하다가 점차 나에게 물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으며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게 되었다. 확연히 달라진 점은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에 민감해진 것이다. 들풀과 들꽃의 이름도 많이 알게 되었고 나무이름도 알게 되어 다른 이들에게 알려 줄 정도가 되었다.
지하철 역에서 책을 반납하면서도 해프닝이 있었다. 난생처음 무인 반납기를 이용하다 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헤매는 모습을 본 아내는 대출구가 아닌 반납기를 찾아 알려준다. 어쩐지 책을 투입할 공간이 없더라니...
반납도 서툴러서 잘 되지 않는다. 보다 못한 아내가 책을 깊이 넣으라고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러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다른 것은 곧잘 알면서 기계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나를 놀리는 것이다. 신혼 초에 형광등 하나 제대로 갈 줄을 몰라 기술자를 불러오라고 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정색을 하며 자신이 뚝딱 갈아치웠다. 기계치인 나와는 다르게 아내는 다행스럽게도 기계를 잘 다룬다. 집에 무엇인가 고장이 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기에 아내가 해결사 노릇을 했다. 심지어 아들의 장난감 조립하는 것조차도 내게는 버거운 일이어서 다 아내 몫이었다. 부끄럽지만 못하는 것을 어쩌랴! 지금 생각하니 그런 아내가 참으로 고맙다.
추운 날씨에도 매화가 꽃송이를 터뜨렸다. 수줍은 듯 몇 송이가 피어났다. 풍성하지는 않아도 참으로 대견스럽고 씩씩해 보인다. 무채색 무심한 겨울나라에 생명의 온기를 지닌 순백의 청초한 자태가 참으로 매혹적이다. 꽃에 빠져들어 사진에 담느라 호들갑인 나를 가만히 놔두고 아내는 자신의 페이스 대로 가던 길을 간다. 같은 관점을 가졌지만 아내와 나 사이에는 온도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아내를 따라간다. 볼멘소리로 좀 기다려 주지 무에 그리 바쁘냐고 툴툴 대면서....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후덕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만나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살아온 것은 대부분 아내 덕이다. 사랑도 많고 마음도 넓은 아내를 만났기에 행복한 결혼 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 자녀를 키우며 까칠하고 괴팍한 남편을 받아주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감싸 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과 사랑을 전한다. 안온한 삼일절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