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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Nov 29. 2018

작은 바이킹, 도망쳐도 괜찮아


바이킹 소년 비케의 필살기 중 하나는 퓨웅- 속력내기이다.

온전한 바이킹이라면 늑대를 만났을 때 거친 콧김을 불어넣어 놀리겠지만 비케는 자신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 오늘 만난 늑대는 제법 빠르다. 뭐, 괜찮다. 미리 준비해둔 피신용 나무 위에서 기다리면 그뿐이니까.


스웨덴 동화작가 루너 욘슨의 대표작 <작은 바이킹>은 정색하는 서사가 많던 <에이브> 전집을 통해 처음 읽었다. 익숙하지만 전통적이지 않은 욘슨의 바이킹들은 큰 인기를 얻으며 속편까지 나왔다. 욘슨의 캐릭터들은 우당탕탕 시트콤의 주인공들처럼 경쾌하다. 행마다 형형색색의 컬러가 물결치는 것 같다. 에베르토 칼손의 그래피티한 일러스트도 유쾌함을 한껏 돋운다. 그러나 이 유쾌한 동화는 그저 말랑말랑하지만은 않다.

에이브 판본, 논장 완역판, 속편


동화 속 소년들은 언제나 모험의 주체이다. 원해서 건 아니건 소녀들이 제비꽃이나 그리며 창 밖을 훔쳐볼 동안 방만하게 모험을 떠난다. 루너 욘슨은 그 소년들 모두가 모험을 즐거워했을까 궁금해한다.

의례적으로 그래 왔기에 응당 그래야 하는 것. 비케는 폭력이 얼마나 익숙한 형태로 간과되는지 알려준다. 비케가 그려내는 OO다움에 대한 반박은 쉬우면서도 재미있다.

#수정의 상자, 모험을 원한 소녀 아솔리나 https://brunch.co.kr/@flatb201/171


비케의 철 번째 모험지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다. 싸움이라면 질색인 비케의 성품은 적자생존의 원칙으로 쌓아 올려진 바이킹 세계에서 그 자체로 웃음거리이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 하르발은 플라케의 족장으로 남자 중의 남자! 바이킹 중의 바이킹! 현대어로 번역하면 마초 중의 마초이다.

아, 이런.. 비케는 잘못된 세계에 불시착한 걸까?

바이킹이라기엔 체력부터 현저히 딸리고 의지는 더더욱 딸리는 비케는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이르바와 하르발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케를 사랑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은 당사자에게 폭력이 된다.


“..당신네 바이킹들은 정말 바보 멍텅구리 고집장이라구요! 고작 낚싯바늘 두 개 때문에 귀 하나에 코 두 개라니. ..(비케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우리는 그 악당들 손에 죽을 뻔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그때 어디에 있었지요? 정다운 우리 하르발 씨?”

“난 그 소릴 백 번도 더 들었어.”


수십 년 전 동화임에도 이르바의 독설엔 언제나 깔깔대게 된다. 비케의 엄마 이르바는 남편이 다그쳐대는 아들의 섬세함이 ‘다른’ 종류의 용기임을 알아본다. 그 다름은 아직 덜 자랐을 뿐 한 손으로 늑대를 때려잡고 거친 바다를 호쾌히 누비는 사나이들만큼 단단하다.

이르바의 독려를 자식사랑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녀 자신도 바이킹 세계에서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르바를 존중받게 해주는 것은 그녀 스스로의 호쾌함보다는 족장의 아내라는 부연이다. 이르바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허세와 무용한 힘겨루기에 냉소한다.


아내의 독설에도 하르발은 오매불망 비케가 바이킹다워지길 바란다. 족장의 아들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만 무엇보다 비케를 더없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몸소 일군 광포한 커뮤니티에서 아들이 우뚝 버텨낼 수 있길 바란다. 그러나 부모가 그린 그림이 자식에게 언제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케를 사랑하는 방식은 오히려 가장 난감한 형태의 폭력이 된다.

#소공자, 품위의 코스튬 https://brunch.co.kr/@flatb201/87


바이킹 중의 바이킹 하르발은 이해하기 앞서 밀어붙인다
에너지 넘치는 바이킹들에게 비케의 갖가지 아이디어는 간지럽기 그지없다. 주먹 한방이면 해결될 것을 말이다.


비케가 바이킹 항해에 나서게 된 것은 자의적 선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하르발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멋진 것-모험을 포상으로 주지만 비케에겐 또 다른 형태의 늑대이다. 행복한 동화들이 그렇듯 비케는 피할 수 없는 이 모험을 치러내고야 만다. 평소 간지럽게 생각해온 비케의 아이디어로 목숨을 구하거나 보물을 지켜낸 바이킹들은 그를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비케를 응원하는 이유가 영민함으로 일궈낸 성공 때문은 아니다.


무사히 치러낸 모험 후에도 비케는 여전히 늑대에게 쫓기는 허약한 소년이다. 

매번 도망만 치는 이에게도 언젠가는 맞서야 하는 순간이 찾아든다. 그럼에도 비케는 도망칠 수 있다면 언제든 도망쳐도 된다고, 그렇게 오늘을 지켜내면 된다고 말한다. 스스로에 대한 단단함이 높은 파도를 탈 수 있게 해 줌을 비케는 알고 있다.

루너 욘슨은 온전한 삶이란 다양성 위에 이루어진다고 따뜻하고 흥겹게 노래한다.

한결같은 비케;;


개선되고, 시도되고 있다 해도 OO다움의 역사는 공고하다. 차별에 당위를 부여하는데 이토록 유용할 수 없다. 성별, 인종, 계층, 이념.. 무엇을 대입해보든 OO다움의 표피 아래에는 결국 자기 이익에 집중된 뻔뻔한 속셈만이 남는다. OO다움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빈번하게 되돌려 받는 피드백은 ‘역차별’이다. 지루하다. 구시대적 발상을 낙후한 단어로 포장하는 것, 그 단어를 내뱉은 자체가 졸렬한 권력이며 가해자의 신분증이다.

진짜 차별을 겪어본 이들만이 역차별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스스로의 씁쓸함을 상기하기에 다른 차별을 겪는 존재를 지지하고 연대해준다.

무서운 늑대를 만나면 있는 힘껏 달려 도망치는 비케처럼.





@출처/ 

작은 바이킹, 루너 욘슨 (Vicke Viking, Runer Jonsson, 1963, 번역 박외숙, 일러스트 에베르토 칼손 Ewert Karlsson)

에이브 전집 37/88, 작은 바이킹 (동서문화사, 1982)

꼬마 바이킹 비케 1, 2 (논장, 2006, 번역 배정희, 일러스트 에베르토 칼손 Ewert Karl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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