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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l 20. 2016

공주와 완두콩, 짐작과는 다른 일들


거친 비바람의 밤, 자신이 진짜 로열 블러드임을 주장하는 초췌한 젊은 여성과 반전의 아침.

안데르센의 첫 동화집에 실린 <공주와 완두콩>은 모럴 자체가 모호하며 개연성을 따질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이야기이다. 분량은 반 페이지 정도지만 이 작품의 인상은 한층 높이로 쌓인 매트리스로 각인된다.

가장 유명한 일러스트는 아무래도 에드먼드 뒬락의 고전적이고 섬세한 작품일 것이다. 독자뿐 아니라 창작자에게도 무수한 영감을 준 안데르센의 작품은 세기가 지남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이 등장한다.

도로테 둔체의 <공주와 완두콩>은 이 동화의 분위기처럼 개성적이다. 성마르고 건조해 보이는 인물, 담백하지만 섬세한 컬러, 태피스트리 같은 장면 전환은 드라마의 분위기를 신비롭고 화려하게 고조시킨다.

#공주와 완두콩, 짐작과는 다른 일들 https://brunch.co.kr/@flatb201/73

#공주와 완두콩,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303





옛날 옛적 ‘진짜 공주’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왕자가 있었다.

진짜 공주를 찾아 세계를 돌던 왕자는 결과 없이 성으로 돌아온다. 그 많은 공주들의 품위가 진짜인지 아닌지 도저히 가려낼 수 없었던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밤,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비가 강처럼 흐른다.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늙은 왕이 직접 문을 열자 그 앞에는 한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비바람에 엉망이 된 그녀는 머리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신발까지 새고 있다. 피폐한 행색에도 그녀는 자신이 진짜 공주라고 소개한다.


‘그래? 그거야 곧 알 수 있겠지.’ 


늙은 왕비는 아무 내색하지 않고 그녀가 자게 될 침실로 갔다. 모든 시트를 걷어낸 왕비는 그 위에 작은 완두콩 한 알을 얹는다. 완두콩 위로 시녀들은 분주히 스무 장의 매트리스와 스무 장의 누빔 이불을 올려 쌓았다.


다음 날 아침, 성 안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잘 잤는지 물었다. 한껏 피곤한 얼굴의 그녀가 대답했다.


“정말 최악이었어요! 밤새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어요. 오직 하늘만이 그 침대에 뭐가 들었는지 알겠지만, 뭔가 딱딱한 것이 쉴 새 없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온몸이 검고 푸른 멍 투성이랍니다! 정말 끔찍했어요!” 


사람들은 그제야 그녀가 진짜 공주라고 인정했다. 오직 진짜 공주만이 스무 장의 매트리스와 스무 장의 누비이불 아래 완두콩을 느낄 수 있는 예민함을 타고나니까. 성대한 결혼식 후 진짜 공주를 가려낸 콩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박물관에 전시된다.




안데르센이 집필을 시작한 시기 아동을 대상으로 한 글은 재미를 추구하지 않았다. 대부분 계도 목적이었기에 당연히 문학 장르로도 간주되지 않았다.

짧은 교육 탓도 있지만 아카데믹한 형식에 연연치 않았던 안데르센은 쉽고 섬세한 문장들을 구사했다. 당시로선 흔치 않은 일상 언어를 수용하고 세세한 묘사를 통해 구현된 판타지는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예쁜 수레국화 꽃잎처럼 푸르고, 투명한 유리처럼 맑은 깊은 바닷속 왕궁 -인어공주

..왕자들은 모두 가슴에 별을 달고 허리에는 칼을 찬 채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들은 황금 석판 위에 다이아몬드 석필로 글씨를 썼고.. -백조왕자

..순록은 작별의 키스를 했다. 커다란 눈물 방울이 순록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반짝였다. -눈의 여왕


사교술이 형편없던 안데르센이지만 루이스 캐럴처럼 아이들과의 친화력은 탁월했다. 놀라운 종이 오리기 솜씨는 서툰 영어에도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어머니 외에 대부분의 성인을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했다. 두려운 만큼 약간의 호감이라도 품게 된 사람에겐 집착했다. 성별에 관계없이 욕망을 품었지만 변변한 연애도 못했고 노년까지 집창촌을 들락거렸다. 그의 작품 내 관능적 에너지를 편안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는 이유다.

#집착, 눈치 그리고 안데르센 https://brunch.co.kr/@flatb201/138


비천한 출신에 눈치까지 없던 안데르센은 일생을 정서적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문학을 통해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자기모순에서 발화된 불안정함에 시달렸다. 이런 소외감은 <미운 오리 새끼> 등의 작품에 투영되었다. 재키 울슐라거의 평전에 의하면 ‘스무 장의 담요 밑에 깔린 완두콩 하나를 병적으로 감지할 만큼 예민한 공주’는 안데르센 자신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타고난 재능으로 주류 사회에서 주목받았지만 결코 그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되지는 못한 굴욕과 신경증을 동화로 꾸민 것이다.

짐작과는 달리 닿을 수 없는 선망으로 괴로워한 안데르센. 극 중 박물관에 전시된 완두콩은 안데르센 자신에 대한 자조처럼도 읽힌다. 기저에 깔린 공허한 욕망과 내밀한 소망이 끝없이 교차하는 쓸쓸함이 비친다.





@출처 및 인용/ 

공주와 완두콩,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The Princess and The Pea, Hans Christian Andersen, 1835)

The Princess and The Pea (North-South Books, 1995, 일러스트 도로테 둔체 Dorothee Duntze)


안데르센 평전, 재키 울슐라거 (The life of a storyteller, Jackie Wullschlager, 2000)

안데르센 평전 (미래M&B, 2006, 번역 전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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