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했는데 알아주지 않아서 억울할 때
학창 시절 시험 기간이 되면 얼마나 공부했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이 있었다. 대답을 들어보면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별로 안 했다고 하는 게 레퍼토리였다. 물론 그 친구들은 만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나도 그런 질문을 받으면 실제 공부한 것보다 축소해서 대답했다. 누구를 견제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성적이 잘 안 나왔을 경우 공부 많이 한 것이 창피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다른 사람들 눈에 '공부 많이 했는데 성적 안 나오는 안쓰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쓸데없고 어린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진짜 안쓰러운 일은 회사에서 펼쳐지는데 학창 시절 지레 겁을 먹다니 말이다.
팀장님께서 혜안을 발휘하셔서 나의 담당 사업부를 옮겨주신 일이 있었다.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기존 업무와 그간의 실수들과 작별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다시 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낯선 업무들을 하는 현실은 마냥 아름답지 않았다. 때마침 개인적인 이유로 주거지가 바뀌게 되면서 체력적인 부담이 가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두 시간이라도 업무를 하고 출근을 했다. 코로나가 걸린 상황에서 재택근무를 하면서 못다 한 업무를 메꾸기 위해 새벽 기상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내가 받은 피드백은 업무를 더 빨리 할 수 없냐는 것이었다. 빈틈없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피드백을 들으니 빈틈없이 일했다고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회의 진행 능력, 보고 능력 등 보이는 부분에서 더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승진을 시켜주기 어렵다는 가슴 아픈 면담을 했다. 그때가 승진을 5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온몸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난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죽을 것 같은데 도무지 알아봐 주질 않는 것 같아 너무 힘들어'
출구 없는 쳇바퀴 속에 갇힌 답답한 마음을 절친한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위로 대신 돌아온 대답은 나의 모습에 대한 진단이었다.
'너 되게 억울해 보인다'
'억울함', 이 단어가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보통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 누명을 씌었을 때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쓰는 단어가 아닌가. 나의 상황은 팀장님의 기대 수준이 높고 내가 그의 미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억울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섭섭한 감정을 느껴야 하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상사인 미란다(메릴 스트립)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앤디 삭스가 나이젤(스탠리 투치)을 찾아가 미란다에 대한 섭섭함을 이야기한다. 그때 나이젤은 앤디 삭스를 위로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WAKE UP. 정신 차려. 미란다는 미란다 일을 할 뿐이야'
그렇다. 회사에서 나는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어린 학생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에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 친구도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고 내 친구가 나를 정확히 진단한 것이다.
나는 상사가 기대한 바를 충족시켜야 하는 직장인이다. 그것이 불만족스럽다면 팀을 옮기거나 회사를 옮기는 것이 맞다. (물론 이는 회사에서 겪고 있는 일이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전제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충격 요법이 통했는지 이후로 나는 억울하다는 감정적인 느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고 끊임없이 개선할 수 있는 최선을 반복했다.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5개월의 시간 동안 변화를 이뤄냈다.
억울하거나 섭섭해하지 않고 그냥 일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