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심장에 산다
무기력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불안 앞에서
외래진료는 진료 일주일 전이 진짜다.
내년 1월에 있던 외래진료를 다음 주 월요일로 앞당겼다. 연 초에 받았을 때에는 반 배정 같은 느낌이었다면 연 말에 받으려고 하니 성적표 같은 느낌이다.
연 초에 받았던 외래진료가 병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면 연 말에 받는 외래진료는 쉐도우 복싱 후 동작을 하나하나 복기하는 것 같다. 후회하고 반성하는 시간들.
그래도 다르지 않은 것도 있다. 외래진료가 가까워지니 심장 주변이 아릿한 것이 그렇다. 어떻게 이렇게 명확하게 심장 주변이 아릿한 걸까. 장기마다 감정이 살고 있다면 불안은 심장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심장에 있다던데 사랑이 항상 불안한 이유는 불안의 옆에 자리 잡고 있어 그런 것 아닐까. 사랑하면 닮는다고 하던데 사랑 그 자체는 불안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을는지.
불안함과 우울함으로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조언보다 안아주는 것이 좋은 위로가 되는 것은 불안도 사랑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일 것이다.
코로나로 사람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하다. 백혈병에 대한 불안감에 코로나를 얹고 싶지 않아 두 팔을 교차해 스스로를 안아본다. 불안도 사랑에게 받았을 영향을 생각하며. 유체이탈 해 희미해진 심장과 선명한 심장이 교차되는 것을 상상해본다.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보니까 그렇게 크게 위로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희미해진 심장도 아리고 선명한 심장도 아린 것은 변함없으니까. 스스로를 사랑하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린 것 더하기 아린 것을 하니 떫어진다. 떫은 감을 먹고 뱉어내듯 ’에퉤퉤‘ 떫은맛 사이에도 느껴지는 감 맛처럼 위로도 떫은 마음 사이에서 존재를 숨기지 않으니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