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일이 많아서 텃밭에 이틀에 한 번씩밖에 가지 못했다. 매일 가다 이틀에 한 번 가게 되어서 그럴까. 텃밭의 변화가 더욱 극명하게 느껴진다. 물을 주다 말고 주저앉았다. 언제 이렇게 자란 것일까. 귀엽고 장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청승맞게 텃밭에 심은 것들의 수명을 검색해 봤다.
감자는 다년생이지만 다른 작물들은 일 년생 혹은 이년생이었다. 우리가 겪는 시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내게는 단순한 하루가 이 친구들에겐 몇 개월의 시간이 농축되어 있던 것이다.
매번 다른 모습의 작물들을 보며 놀라워하는 내 상태를 보고 작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저 인간은 오랜만에 볼 때마다 참 발전 없이 그대로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질을 심은 곳에 싹이 올라왔다. 동그란 것이 똘똘하게 생겨서 단번에 알아봤다. 뻥이다. 혹시나 잡초일까 봐 사진을 찍으면 식물명을 알려주는 어플을 사용해 알았다. 옆에 이슬을 머금은 풀도 있길래 사진을 찍어보니 별꽃이라고 했다. 이슬을 머금은 모습이 아련해 키워볼까 했지만 별꽃의 뿌리가 작물의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말에 그냥 뽑아 버렸다. 손가락에 묻은 이슬이 차가웠다. 바질도 결국 먹을 거면서 별꽃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찾아보니 싹은 외국에서 샐러드로 먹기도 하고 된장국으로 먹기도 한다고 한다. 먹을 수 있는데 뽑아서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은 재미로 사냥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다음번엔 모아서 된장국을 한 번 끓여봐야겠다.
쑥갓이 제법 쑥갓처럼 보인다. 똥풀들을(쑥갓, 치커리, 상추) 구별하지 않고 마구 뿌려 놓은 탓에 솎을 때만 해도 뭐가 뭔지 몰랐는데 좀 자랐다고 지금은 거꾸로 봐도 쑥갓이다. 작은 쑥갓이 커서 큰 쑥갓이 된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어른이 되면 뭐가 좋아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지나니 좋아지긴 개뿔. 그냥 어른이 된 내가 있을 뿐이었다. 지지리 궁상이다. 쑥갓도 당황했겠다. 별 일 아니라고 물을 듬뿍 뿌려주었다.
씨감자는 분명 같은 날에 심었는데 어떻게 싹을 틔우고 올라오는 시간은 모두 다른 걸까. 감자를 볼 때마다 자꾸 듬직하단 생각이 든다. 싹이 올라오기 전 흙이 금 가는 것을 몇 번 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주변에 상추 사진을 공유할 때마다 이제 먹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 따라왔다. 매번 모종이라고 심은지 얼마 안 되었다고 말했었다. 오늘 아침에 본 상추는 달랐다. 진짜 먹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상추 따는 법을 검색하고 애인에게도 상추 따는 법을 물어봤다. 잎을 끝까지 잘 따야 한다고 했다. 슈퍼에서 대패삼겹살과 쌈무를 사다 놓고 다시 텃밭으로 향했다. 줄기의 끝을 손톱으로 누르며 뜯었는데 마음이 심란해졌다. 유튜브에서 식물도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을 하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상추들도 나를 그렇게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졌다.
상추를 씻기 전 식초 푼 물에 담가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식초를 찾아봤는데 사과 식초 밖에 없었다. 사과향 나는 상추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그냥 썼다. 상추가 대야에 가득한 것을 보니 기분이 들떴다. 혹여나 내가 잘못 키워 쓴맛이 강하면 어떻게 하지 싶었지만 일단 처음 키워본 것이니 아무리 써도 다 먹을 생각이었다. 상추 여러 장에 쌈무 한 장 거기에 삼겹살과 된장까지 한 입 가득 넣으니 맛있었다. 아니 맛있다는 느낌보다 즐거웠다. 쓴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차, 사과 향도 나지 않았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쌈을 계속 싸 먹었다. 애인은 상추 지옥에 빠질 거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애인이 나를 얕잡아 본 것 같다. 오늘 수확한 것의 3분의 1을 한 끼에 다 먹었다. 다음 수확 땐 참치와 고추장을 넣고 비빔밥을 해 먹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