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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Mar 19. 2019

"누가 욕하지 않아요?"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들


                           

남들이 뭐라건 개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립니다.  

    

흑백 화면에 갑자기 선명한 빨간색이 튀어나온 것처럼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살아가다 보면 간혹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들에게서 느꼈던 신선함은 언제나 적당히 서늘한 온도로 유지됩니다.              


            


스물 초반, 프랑스어 학원에서 만났던 선생님은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어요. 체구가 작고 목소리가 부드러웠던 여 선생님이셨죠.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오신 탓에 한국어에도 묘한 프랑스어 악센트가 묻어났어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한국인이었기에 정말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특히 그 선생님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의 사건 때문입니다. 날씨라는 게 참 변덕스럽잖아요. 바로 전날까지는 찌는 듯했지만, 웬일인지 그 날은 아침부터 공기가 선선했어요. 여름옷을 입기엔 약간 추운 날씨였죠. 그래도 도톰한 옷을 입으면 어쩐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아, 얇은 옷을 입고 학원에 갔어요. 모두들 '어우, 오늘은 좀 쌀쌀하네' 입을 모았지만 두껍게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초겨울에나 입을법한 가디건을 몸에 걸친 선생님이 나타나자 우린 모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수강생 중 약간 나이가 지긋하신 한 아주머니가 선생님께 이렇게 묻기 전까진 말이에요. "아니, 선생님. 한여름에 그렇게 입고 다니면 누가 욕하지 않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솔직히 말해 그 당시엔 속이 좀 시원했습니다. 저도 그게 너무 궁금했었거든요.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 뒤 대답하셨어요. "이게 이상한가요? 추워서 입은 것뿐인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표정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그 날 아침, 옷장 앞에서 망설였던 제 모습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진 순간이었죠.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통쾌하기도 했어요. 저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거든요.                         




그 이후로도 선생님의 독특한 면들을 엿볼 수 있는 소소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어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선생님을 '독특하다'라고 표현하는 게 옳은 지는 모르겠지만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쉬이 깨지지 않는 당당함을 품고 있습니다.                          




미국의 사진작가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1923-1971) 또한 그런 사람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카메라에 담은 사람들이야말로 '당당함'과 거리가 먼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스의 카메라는 정신병자, 성도착자, 선천적으로 기형인 사람들, 모두가 혐오스럽다고 말할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뭐 어때이게 바로 나야.             




                       

다이안 아버스, 헤어롤을 말고 있는 젊은 남자, 1970년경

                                                          


다이안 아버스,  호텔룸에 있는 멕시코 출신 난쟁이,1970년경

                   


그런 아버스의 사진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매혹당했다 해야 할까요. 세상엔 예쁜 것이 넘쳐나는데 하필 이런 사람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닌 아버스라는 여자가 궁금해졌습니다.         


          

       

이들은 나를 대단히 흥분시킨다.     

나는 늘 그들을 찬미한다.             



            

아버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재미있는 건, 그녀가 흥미를 느낀 존재들의 반응이에요.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손톱을 길게 기른 남자는 도발적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요. 왜소증을 가진 남자 역시 카메라를 피하지 않아요. 정신병동의 잔디밭에서 웃고 장난치는 여자들은 여느 발랄한 소녀들과 다르지 않네요. 저런 사람들은 아마도 매우 불행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우리들의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만일 사진 속 인물들이 자신을 불행하다 여기며 그늘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면 그녀의 사진은 전혀 다르게 보였을 거예요.              



            

다이안 아버스, 정신병원의 환자들, 20세기 후반

                         


아버스 사진 속 피사체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온 비정상적인 이들입니다.     

그들을 보듬으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죠. 그 사실은, 여전히 그들이 우리 사회의 외진 곳에 서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혐오할 것이고, 누군가는 동정할 거예요. 그저 시선을 돌려버리는 이들도 있겠지요.  아버스는 바로 그런 사람들, 세상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그들은 카메라를 피하기는커녕 너무도 당당하게 카메라를 향해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말했듯 아버스의 사진은 연민이란 감정을 뭔가 부적절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요.                          



어쩌면 연민은 '나는 그들과 다르며, 나는 그들보다 우월하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감정일지도 몰라요.  과연 우리에게 그들을 연민할 권리가 있는 걸까요?            




스테판 프랭크, 자신의 사진 작품을 들고 있는 다이안 아버스, 1970

          


아버스는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엘리트였습니다.      

그녀는 스승이었던 사진작가 리제트 모델(Lisette Model)의 영향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찍기 시작했어요. 1967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뉴 다큐멘트(New Documents)'전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대중에게 선보입니다. 이 전시 이후 그녀는 '금기를 깬 사진작가'라고 불리기 시작했어요.                          



아버스에게 성도착자, 거인, 기형인들과의 접촉은 대단한 금기였을 거예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치거나 대화를 할 필요가 없는 이들이었을 테니까요. 그녀가 그들에게 그토록 매혹된 이유가 짐작됩니다. 아버스는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을 거예요. 핸디캡을 안고 태어난 소수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당당함, 자기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는 아버스에게 큰 자극이 되었겠죠.   


       

다이안 아버스, 정신병원의 환자들, 20세기 후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동안 신체적 상처를 입지 않을까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기형인들은 외상(外傷)과 함께 태어난다.      

그들은 이미 삶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귀족이다.              



           

아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버스 사진 속 소수자들은 누군가가 동정해야 할 대상도, 사회가 구원해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정상인(혹은 스스로 정상이라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외부적 상처를 이들은 이미 갖고 태어났습니다. 삶의 시험을 이미 통과한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아버스는 대낮에도 플래시를 썼습니다. 역광으로 인해 피사체의 얼굴이 어둡게 찍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죠. 어느 때보다도 훤히 드러난 신체로 카메라에 포착된 사람들. 아버스는 이런 방법을 통해 그들에게 어떤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적어도 그녀 사진 속에서 그들은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그림자를 걷어버리고 온전한 모습으로 설 수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또다시 말합니다. 뭐 어때, 이게 바로 나인걸.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게 나야,라고 말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니까요. 무언가를 선택할 때 나 자신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신경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저는 그것이 더더욱 어렵습니다. 누가 욕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해본 이라면 아마 공감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며 깨닫는 게 하나 있어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 일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요. 설령 관심이 있었다 해도 그리 오래가지 않더라고요. 타인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는 쉽잖아요. 하지만 결국엔 각자 인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나요? 평생 남 이야기만 하며 살 수는 없죠. 이런 마음으로 돌이켜보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행동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돼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생각해봐요.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에요.     

뭐 어떤가요     

이게 바로 나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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