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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28. 2020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1881년 11월 10일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난 추억은 모두 각색되고 편집되어 아름답게 남는다지만 이상하게 그 시절은 내게 힘든 시간들로 기억된다. 갑자기 어른이 되었고 많은 자유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아주 좋은 카메라를 선물 받았지만 설명서가 없어 막막한 그런 기분. 상자 속에 담긴 멋진 카메라를 바라만 봐야 하는 심정과 비슷했다. 설명서 한 장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어설프게나마 청춘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온통 시행착오와 실패 투성이었던 날들. 그래서 나는 그 시간들이 무사히 지나가 이미 과거가 된 것에 안도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따금 생각한다. 한 번쯤은 스무 살 무렵의 나로 돌아가 보고 싶다고. 딱 한 가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에.




바로 최선을 다해 사랑해 보는 것.

그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형의 무엇이든 상관없다. 진심을 다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 때문에 혹여 상처 받는다 해도 온 마음을 다해 울어보는 것. 이십 대의 나는 어딘지 미적지근했다. 좋아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고, 내 마음을 온전히 쏟는 것을 두려워했다. 몰입하지 못했다. 언제나 표면 위에 어정쩡하게 머물러있었다. 그러니 결코 '진짜'와 마주할 수 없었다. 표류하는 마음은 허무하게 이리저리 떠돌다 시답잖은 것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길 반복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그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 사람을, 사물을, 순간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만일 내가 그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진심을 다해 어떤 대상에 몰입하는 무언가를 볼 때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들. <브로크백 마운틴>의 잭과 에니스가 나눈 유일하고 숭고한 사랑은 여전히 나를 일깨우고 <테레즈 라캥>에서 죽어야만 비로소 끝이 나는 지독한 사랑을 보여준 테레즈와 로랑은 내 가슴에도 알 수 없는 불을 지피곤 한다.






분명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고흐는 스물여덟에 사촌 케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에게 열렬히 애정을 표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그녀의 거절이 고흐에겐 커다란 고통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그는 두려움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괴로움에도 고흐는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상대방이 어떤 마음인지 헤어리지 않는 미숙함을 보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랑은 신기한 힘을 가졌다. 기쁨으로 날아갈 것 같다가도 슬픔으로 세상을 잃은 듯 괴로워지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은 폭풍우가 예고 없이 불어오는 바다와 같다. 잔잔하던 마음이 매섭게 휘몰아치기도 하는 것이다.


 

반 고흐, <숲 속의 두 사람(Undergrowth with Two Figures)>, 1890, 신시내티 미술관




고흐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은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부질없이 흩어지는 꿈에 불과했다. 그래서 동생 테오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흐는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헛헛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까운 누군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게 됐을 때 느끼는 허무함도 있었으리라.




1890년에 그린 <숲 속의 두 사람(Undergrowth with Two Figures)>은 수많은 고흐의 작품 중에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곧게 뻗은 나무가 빽빽하고 싱그러운 풀잎과 노란 꽃들이 우거져있다. 고흐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불타는 노란색이 아니라 흰색이 섞인 부드러운 노란색이 그림 속에 일렁인다. 그림 가운데에 두 사람이 보인다.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검은 모자를 쓴 키 큰 남자와 그 곁에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 나란히 선 모습에서 두 사람이 연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숲 속에서 찍은 웨딩 사진 같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묘사한 것과는 달리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은 밝지 않다. 묘하게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숲의 끝은 저 멀리 검게 물들어 있다. 저 숲 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면 암흑이 펼쳐질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드는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추측하기에는 그림 속 나머지 부분이 한낮처럼 밝다. 두 사람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 수 없다. 미지의  숲 속에서 꼭 붙어 있는 두 사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서로만 있다면 두렵지 않은 그런 믿음. 노랗게 피어난 꽃밭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두 사람은 어둠이 밀려오는 숲에서도 꼿꼿하다. 마치 그 어둠에 맞서기라도 하는 듯. 사랑은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 했던가. 고흐가 상상한 사랑은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흐는  끝내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고흐는 테오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사랑하는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것이 아니면 죽을 것 같던 시간을 지나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고흐 역시 그랬으리라.




고흐가 <숲 속의 두 사람>을 그린 1890년은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해이기도 하다. 삶은 예기치 않게 끝났다. 고흐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바보처럼 낭만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순간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 내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고흐의 저 문장에 끌린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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