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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09. 2021

많이 감탄해라

1874년 1월



중학생 시절, 용돈이 생기면 집 근처 대형마트로 가곤 했다. 식료품이나 군것질 거리 때문은 아니었다. 마트 1층 오른쪽 코너는 전자제품이 즐비했다. 몇만 원으론 택도 없는 값비싼 것들. 나는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전자제품을 파는 곳에서 조금 더 구석으로 들어가면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이 빼곡했다. 얇고 네모난 투명 케이스에 담긴 수많은 음악 CD. 레코드점은 규모가 작았지만 유명한 한국 가수부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 살고 있는 가수까지 다양한 종류의 CD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노르웨이인지 네덜란드인지 확실치 않은 어느 나라의 재즈 그룹이 발매한 CD를 산 적이 있다. 그 앨범에서 처음으로 'Tenderly'라는 노래를 들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가수가 나지막이 울리는 재즈 반주에 맞춰 나른하게 부르는 그 노래는 십 대 소녀에겐 낯선 충격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책 속에서나 읽었던 오래된 유럽 도시에서 지는 해를 등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꼭 저런 나라에 가야지. 여기서 '저런 나라'는 실체조차 없는 어느 멀고 아름다운 나라를 의미했다. 타국의 재즈 그룹은 나를 묘한 향수에 젖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었지만 그때 내가 상상했던 나라는 어디인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Tenderly'를 들을 때마다 내 가슴 저 깊은 곳은 부드럽게 흔들린다.




새 CD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환상적이었다. 두근거림과 설렘을 한 아름 안고 방으로 들어와 비닐을 뜯을 때의 기분. 자켓 표지부터 마지막 장의 제목 리스트까지, 앨범은 내게 한 권의 책과도 같았다.  그다음엔 음악을 들을 차례. 당시 앨범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의 노래가 수록돼 있었다. 한 곡을 4분에서 5분 정도로 잡으면(당시엔 요즘보다 노래의 길이도 길었던 것 같다) 대략 50분에서 1시간 정도 온전히 몰입할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가사를 읽으며 노래를 들었던 그 시간들은 마치 조그만 성 안을 홀로 거니는 것처럼 평화롭고 행복했다. 나는 그 시절, 소소한 것들에 쉽게 감탄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마음들이 많이 무뎌지는 것을 느낀다.  





반 고흐, <삼나무가 있는 밀밭>, 1889




많이 감탄해라





21살의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 청년에게 이 세상은 경이로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고흐가 마냥 행복을 느끼는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감성적으로 매우 예민했던 고흐에게 사실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시간'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으니까. 집에서 32km나 떨어진 학교에 다니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그 시기를 고흐는 괴롭게 기억한다. 




하지만 고흐는 이 세상의 멋지고 아름다운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풍경에 넋이 나가기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경탄을 보내기도 한다. 절망적이고 어두운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가 남긴 작품들은 꽃과 나무와 별빛이 쏟아지는 밤, 그런 것들이었다. 고흐의 1889년 작품 <삼나무가 있는 밀밭>은 그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정신 착란과 우울이 심각해진 고흐는 1889년 5월 8일 생 레미(Saint Rémy)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7월에 <삼나무가 있는 밀밭>을 그렸다.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그림을 본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고흐의 여러 작품 들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이 작품은 한 여름의 푸르고 싱그러운 향기를 오롯이 담고 있다. 흰색, 하늘색, 연한 민트색이 어우러진 하늘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고흐에게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일이었다. 




고흐는 테오에게 "많이 감탄하라"라고 권유한다. 그저 내가 많이 감탄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감탄하며 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무언가를 보고 감동받는 순수한 감정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삶은 생각보다 다채롭지 않고 일상은 무료할 때가 많다. 하지만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도 누군가는 행복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지루함을 느낀다. 쾌청하게 맑은 하루,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이 있고 푸른 하늘은 올려다보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청년 고흐는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동생에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직 그림은 시작도 하지 않았던 스물한 살의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한 고흐는 섬세한 감각이 필수인 예술가가 될 숙명이 었던 것 아닐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CD 플레이어를 꺼내지 않는다. 매일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신곡들을 손쉽게 찾아 들을 수 있으니까. 어제 들은 곡을 오늘 더 이상 듣지 않을 때도 허다하다. 나의 마음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노래들 속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노래뿐일까. 세상엔 멋지고 좋은 것이 너무 많고 우리는 편리하게 그것들을 취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점점 더 무언가에 전율하고 감응하기 어려워진다. 그래도 누구나 한 때는 어떤 것에 깊이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천천히 얻는 것이 점점 적어지는 요즘, 나는 나를 진심으로 흔드는 것들이 그립다. CD 더미에 가득 내려앉은 먼지를 손으로 쓸며 그 옛날 들었던 'Tenderly'를 떠올려본다.   



Your arms opened wide And closed me inside

당신은 나를 당신의 넓은 팔 안에 가두고

You took my lips

내 입술을 가져갔어요

you took my love so tenderly

내 사랑을 가져갔어요, 그렇게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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