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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05. 2021

온 세상이 비에 젖어있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1882년 8월 20일


"이혼할 거야!(I wanna divorce!)"


온 세상에 마구 뿌려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예쁘게 세팅한 머리도, 고급스러운 옷도, 공들여 한 메이크업도 모두 비에 젖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우산을 뿌리치고 자신을 향해 열린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가는 여자. 배경음악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비(Rain)>가  흘러나온다. 가슴 떨리게 하는 극적인 선율.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이다. 지금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씬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의 두 번째 부인 '문수'는 황실의 규율에 별다른 답답함이나 불만을 보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자유를 갈망한다는 느낌도 희미했다. 그런 문수가 무너져가는 청나라 황실의 현실을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한다. 세상 전부인 줄 알았던 궁궐 속 생활이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높은 벽은 사실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문수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다시 살아보고 싶은 열망에 휩싸인다. 그렇게 그녀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황제와 이혼하겠다는 외마디 말을 외친 채 빗 속으로 사라진다.    



앞에 선 사람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비가 퍼붓는 날. 옷과 신발, 머리가 젖지 않기 위해 우산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이치는 비는 속수무책이고 어느새 온몸은 눅눅해진다. 비 오는 날은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사실 어릴 적 나는 비 맞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우산은 내팽개치고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난다. 빗물에 머리를 감는 시늉을 하며 깔깔거리고 물웅덩이를 일부러 첨벙거리며 걷던 아이. 어느새 비 한 방울 몸에 묻히지 않으려 잔뜩 긴장을 하고 빗속을 걷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렇게 깐깐하고 귀찮은 게 많은 어른이 되어서 본 <마지막 황제> 속 문수는 내게 잊고 있었던 유년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비, 우산도 없이 그 속을 달릴 때의 해방감. 그래 바로 이거였다. 해방감. 자신을 가두었던 울타리를 부수고 내면 깊이 숨겨왔던 욕망을 분출하는 것. 나는 언제나 내 안의 어떤 감정을 마음대로 내뿜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갖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래서였을까. 문수의 돌발적인 행동이 너무 좋았다. 통쾌했다.  



반 고흐, <비(rain>). 1889, 필라델피아 미술관



고흐가 그린 <비>는 마치 문수가 뛰쳐나가던 영화 속 배경 같다. 세차고 강인한 비가 산과 들판, 농장 위로 쉴 새 없이 퍼붓고 있다. 쏴아- 하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초록으로 우거진 나무와 흙이 젖어든 알싸한 비 냄새가 코 끝에 떠오른다. 고흐는 작열하는 태양을 많이 그렸던 화가로 기억된다. 노랗게 타오르는 태양과 해바라기.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그의 그림은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있다. 태양은 고흐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는 비현실적으로 선명한 노란색을 사용해 불안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었다. 언젠가는 이 어둠이 걷히고 해가 뜰 거야.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빛을 갈망하듯 그렇게 고흐는 빛나는 것들을 캔버스에 담았다.



하지만 나는 굵은 빗줄기를 가득 그린 이 작품에서 또 다른 희망을 읽는다.

하늘은 두꺼운 구름으로 뒤덮였고 풍경은 우중충하다. 빛이라곤 없는 날씨. 그러나 땅을 뚫을 듯 쏟아지는 비는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나무와 곡식은 비를 머금고 더욱 풍성하게 자라날 것이다. 먼지는 깨끗이 씻겨나가고 세상은 물기로 반짝일 것이다.




온 세상이 비에 젖어있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흐 또한 문수처럼 우산도 없이 비를 맞아본 적이 있는 건 아닐까? 내리는 비를 보며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을까? 고흐는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충동적인 사람이었으니 아마 그런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수가 이혼을 외치던 날, 왜 하필 비가 왔을까. 이는 문수가 금기를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다. 문수에게 있어 금기는 이러한 것이다. 황제의 두 번째 부인으로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 자유에 대한 욕망을 품지 말 것. 그리고 또 하나, 비 오는 날은 우산을 써야 할 것. 우리는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하고, 비를 맞으면 안 된다고 배워왔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우산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비를 맞는 건 미친 짓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금기에 개의치 않고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비 오는 장면을 보며 감탄했던 고흐도 언제나 금기에 도전했던 인물이었다. 당대의 화풍에 따르지 않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사랑해선 안된다고 여겨졌던 여인을(고흐는 매춘부를 사랑했고 고흐의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은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감정에 치우쳐 자신의 귀를 자르기도 했고 귀가 잘린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기는 대담함도 보였다.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고흐는 평탄한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래서 그는 불행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고흐를 기억하고 사랑한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빗속으로 달려간 문수의 이야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금기를 깬 자들에게 이 세상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진짜 삶을 살았으리라.


주말 내내 비가 내린다. 고흐의 말처럼 온 세상이 비에 젖어있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다.



 




      온 세상이 비에 젖어있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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