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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29. 2020

서두를 필요는 없다

1883년 8월 4일~8일




오랜만에 친한 동생을 만나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다. 나보다 여섯 살이 어린 이 친구는 확실히 활력이 넘쳤다. 올해 새로운 여자 친구도 생겼고, 적성에 맞는 일을 막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 그 나이 때의 나와 비교해보면 요즘 이십 대는 욕구가 선명하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유명해지고 싶어.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될 거야. 거침없이 내뱉는 말들에 무료하게 가라앉아있던 내 몸도 함께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뿐. 사실은 말이야, 하고 말문을 열어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나는 요즘 쉬는 게 쉬는 거 같지 않고 뭘 해도 힘이 나지 않아. 왜 그럴까? 




정답을 원하고 묻지 않았지만 의외의 정답을 얻을 때가 있다. 그 애가 말했다. 누나는 너무 생각이 많은 거 아냐? 쉰다고 하지만 정말 쉬어본 적이 있어? 글쎄. 그러고 보니 쉬기 위해 놀러 간 곳에서도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마냥 놀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책이라도 읽으려 한다. 아니면 영화라도 한 편 보거나. 한 마디로 쉬면서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야 안심이 된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 친구가 말했다. 

언제 가장 마음이 편하고 진짜 쉬는 것 같다고 느끼는지 생각해봐. 분명 있을 텐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잠자코 있자 마치 힌트라도 주듯 그 애가 말한다. 나는 말이야. 최근에 떠난 여행에서 굉장히 오래 기차를 탔거든. 한 다섯 시간 정도? 천천히 달리는 기차 안에서 커튼을 걷고 흘러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봤어 나도 모르게. 정말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은 하나도 없이 그 장면을 보고 또 봤어. 그 순간 '정말 쉬고 있구나' 느꼈어. 그 말을 들으니 하나 생각나는 게 있었다. 주저하며 말했다. 



나는... 샤워할 때 그런 것 같은데. 


그래 그거!



맞아. 샤워할 때 나는 진짜 편안해져.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흐르는 물줄기를 느낄 때, 해방감을 느껴. 이건 진짜다. 복잡하던 머릿속도 같이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 내 몸을 씻는다는 그 행위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 뽀득뽀득,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나를 돌아보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향긋한 냄새가 나를 진하게 감싸는 행복. 샤워를 끝내기 아쉬워 모든 걸 다 헹궈냈는데도 샤워기 아래 한참이나 서있곤 한다.   

 


그럼 누나는 이제부터, 일상 속에서 샤워할 때의 기분을 찾으려고 해 봐. 



샤워할 때의 기분을 찾기. 잘 쉴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얻은 것 같아 가슴 한쪽이 든든해졌다. 






언제나 열정적이었던 고흐도 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계속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는 없으니 빨리 작품을 그리고 팔아야 했다. 동료 작가들은 인정을 받기 시작하고 가까이 지냈던 고갱 또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싶은 그림은 많은데 재료비는 감당할 수 없고, 시간만 흐르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건 당연했다. 고흐는 앞으로 얼마나 작업을 할 수 있을지 계산하며 걱정한다. 다가올 10년 동안의 계획을 구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 아닌가. 고흐는 그저 마음이 급했던 것 같다. 그런 고흐가 어느 날 테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고흐 역시 서두르고 싶지 않았지만 서두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힘들었으리라. 

결과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 동생을 향한 미안함. 그런 모든 감정 속에는 '쉬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섞여 있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몰아세우는 것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반 고흐, <레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의 고깃배들>, 1888, 반 고흐 미술관



고흐가 1888년 그린 <레 생트 마리 드 라 메르의 고깃배들>은 고흐의 작품 중에서 몇 안 되는 평화로운 풍경을 담고 있다. 프랑스 남부의 한적한 바닷가. 갈매기 한 마리가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다. 저 멀리 수평선은 민트색으로 빛나고 파스텔톤의 하늘빛이 부드럽게 반짝인다. 철썩, 철썩, 해안가에 와 닿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돛을 단 배 들이 먼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마치 순서를 정하고 달리는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저 배들은 해가 지기 전에 고기를 가득 담은 채 돌아올 것이다. 




아직 바다로 나가지 않고 모래에 몸을 기대고 있는 배들도 보인다. 마치 멀리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하듯이 여유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배들은 지금 쉬고 있다. 언젠가 바다로 나가야 할 차례가 돌아오겠지만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잡생각을 버리고 쉬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고흐의 진심을 본다. 고흐는 저만치 앞서 가는 동료 화가들과 무섭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며 마음 졸였지만 한 편으론 자신의 속도에 맞게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여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그러나 현실은 고흐에게 쉴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았다. 




정박해 있는 배들 중 세 번째 배의 이름은 아미티에(Amitié)이다. 아미티에는 '우정'을 뜻한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편안하게 쉬며 바쁜 일상을 잠시 잊기도 하는 것. 고흐는 그런 삶을 꿈꿨다. 나 또한 그런 삶을 꿈꾼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제대로 항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벼운 바람,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 그리고 서두르지 않는 마음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돛을 내리고 한적한 바닷가에서 충분히 쉬어도 된다. 그 다음에 채비를 갖추어 또 다시 바다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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