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881년 12월쯤이니 이 편지를 쓸 때 고흐는 애송이 화가에 불과했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희망에 부풀곤 한다. 왠지 잘될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들뜬다. 그렇게 빵빵하게 차올랐던 희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바람이 빠진다. 현실은 이상과 자꾸만 부딪히고 결과는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맘때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됐지 뭐. 어차피 해봤자야. 그만두기 위한 합당한 이유를 계속해서 찾는다. 누가 뭐라던 자신의 길을 걷는 이도 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것은 보통 의지로는 힘든 일이다.
주변의 이야기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쉽게 평가했었다.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없는데 그냥 못마땅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들의 단단함을 질투했던 것 같다. 쉽게 방황하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잘 흔들리고, 기대로 가득 찼던 가슴이 금세 불안으로 물들곤 했던 내게 저들의 단단함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닮고 싶고, 갖고 싶지만 언제나 저만치 앞에 서 있는 허상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꿈을 버리며 살아왔을까?
스스로 단념해버린 희망은 셀 수 없이 많다. 한 때 잠시 반짝였던 그 희망들은 이제 불 꺼진 가로등처럼 내 마음속 어딘가에 쓸쓸히 서 있을 것이다.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붓을 들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서른이 가까운 나이까지 고흐는 방황했다.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무엇에 몰두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고흐가 살던 시대도 지금 우리네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탄탄한 직장에 들어가 안정적인 보수를 받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대부분 젊은이들이 원하는 삶이었다. 누군가는 평범한 삶이라 말하는 그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꿈에 불과한 삶이기도 했다. 고흐는 언제나 그런 인생을 원했지만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항상 돈을 벌길 바랐지만 늘 궁색했고, 사랑을 꿈꿨지만 한 번도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깊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고흐가 왜 희망을 잃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테오에게 "분명 언젠가는 그림이 팔릴 게다"라며 자신에 가득 찬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해서 고흐의 말을 곱씹다 보니 이 문장에 숨겨진 이야기가 보였다. '분명', '언젠가는'이라는 단어들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막연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 문장을 쓸 때 고흐는 확신이라기보다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정말 내 그림이 한 점도 팔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 불안을 지우기 위한 자기 암시. 고흐는 테오에게 나는 지금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림들이 곧 팔리게 될 거라고 말한 뒤에 한 가지 부탁을 한다.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돈을 좀 보내다오. 고흐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반 고흐, <부러진 버드나무(Pollard Willow)>, 1882, 개인 소장
고흐는 분명 굳센 의지를 가진 예술가였다. 하지만 어딘지 부러져버릴 것만 같은 연약한 심성 또한 숨길 수 없었다. 고흐가 1882년에 그린 <부러진 버드나무(Pollard Willow)>는 그런 그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얕은 강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린 채 서 있다. 겉으로 보기에 굵고 단단해 보이는 이 나무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부러져버렸다. 속은 텅 비어있다. 그래도 한 때는 무성한 잎을 주렁주렁 매달고 길가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웠을지도 모를 나무. 좁은 길목을 걸어오는 한 남자와 저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건물, 소박한 풍차가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인다. 고흐는 유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수채화도 많이 그렸다. 이 작품 역시 수채화다.
부러진 버드나무를 그리는 고흐를 떠올려본다. 별생각 없이 선택한 그림 주제일 수도 있다. 가끔 지나다니는 길에 홀로 선 이 나무에 괜히 신경이 쓰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고흐는 그림에 색을 덧입히기까지 열심히 스케치를 하고 구도를 잡고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 한 점. 이 나무는 영영 죽어버린 걸까? 충분한 햇살과 촉촉한 빗방울이 있다면 다시 잘 자랄 수 있지 않을까. 그림을 다시 한번 천천히 보았다. 남자가 걷고 있는 길 위에 물웅덩이 같은 것들이 보인다. 바짝 말라 있는 땅 같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먹구름만 가득한 것 같았던 하늘 틈새로 푸른색이 언뜻언뜻 보인다. 어쩌면 이 그림은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다음에 하늘이 천천히 개고 있는 시간을 담아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림을 두 번, 세 번 다시 볼수록 확신이 들었다. 이 그림은 우중충한 날씨에 비가 흠뻑 내리고 난 뒤, 차차 맑아지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고흐는 불안했지만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문장 속에도, 그림 속에도 그 메시지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분명 언젠가는 내 그림이 팔릴 게다. 분명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