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한 때, 나는 영화광이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개봉 영화란 영화는 다 보고 다녔던 시절이어서 꽤 오랜 기간 CGV의 VIP 고객으로 상당한 혜택을 누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엔 리처드 기어라는 배우가 꽤나 핫 한 남자 배우였는데 언제나 그렇듯 내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 속 장면들은 어디서든 비슷한 상황에 접하게 되면 한 번씩 툭 튀어나와 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해 주곤 한다. 가을이 되면 늘 생각나는 이 영화는 사실 리처드 기어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바람둥이 캐릭터의 이야기였는데 스토리가 크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으나 센트럴 파크의 가을 풍경 때문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었던 듯하다.
요즈음 나는 다시 이 영화의 기억으로 하루의 아주 잠깐을 말랑말랑하게 보내고 있다. 사실 영화와는 가을날의 공원이라는라는 배경만 같을 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더군다나 영화에서 보이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그저 조금은 따분하고 지키기 쉽지 않은 매일매일의 루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상기함으로써 조금은 게을러질 수 있는 나의 루틴에 스스로 조금은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한다고나 할까?
혼삶러 또는 자유인에게 규칙 또는 루틴이란 스스로를 옭아매는, 어쩌면 용기나 결심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전혀 자의적이지 않게 이 루틴을 지키며 올 가을을 보냈다. 바로 반려견 코코 때문이다. 혼삶러에게 반려견이란 강아지를 넘어 동반자나 친구, 가족 또는 그 이상의 의미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대가로 '개집사'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시간을 강요받는 것도 사실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개춘기의 코코는 며칠 전 제습기 한 대를 해 먹었고, 한쪽 벽면을 다 뜯어버렸고, 거실 한가득 씹다 만 개껌과 장난감과 양말과 천조각들로 엉망을 만들었고, 혹여라도 슬개골을 다칠까 깔아 둔 폭신폭신 매트들이 무색하게 뛰어다니기를 수십 번,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일거리들로 폭탄 맞은 집을 만들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녀석이 주는 의미가 사람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개집사'인 나는 혹여라도 다칠까, 뭘 잘못 먹을까 쫓아다니며 (물론 화도 내고 혼도 내지만) 물건들을 정리하기 바쁘다. 더구나 소리에 민감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에도 반응하는 요 녀석에게 화 한번 제대로 못 내고 쉬쉬 조용히 하라 가슴 졸이고 있으니 참 상전이 따로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 따라디니는 이 껌딱지에게 꿀 떨어지는 눈빛을 발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제나 내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도 내고 하루 중 꽤 긴 시간을 개껌 하나 던져주고 나가는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늘 나만 바라고 나의 애정을 원하고 끊임없이 귀여운 눈빛을 발사하고 냅다 배를 뒤집어 복종을 약속하는 이 녀석은 늘 변하지 않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스럽다 할지라도 개춘기의 본능적 반항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순전히 개집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침 산책이라는 루틴이다. 이 도시는 강아지를 키우기에는 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가는 곳곳, 눈을 돌리면 마주하는 공원들은 개춘기의 강아지에게도 사추기의 개집사에게도 잠시 잠깐 마음이 평온 해지는 시간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하다. 양껏 뛰고 냄새 맡고 새들 쫓아다니며 훼방 놓고, 가끔씩 만나는 다른 강아지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온 에너지를 쏟고 나면 집에서 피우는 말썽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판단이 선 이후로 가능하면 나는 매일 아침 산책을 나가는 편이다. 짝퉁 'Autumn in New York'을 한 편 찍고 오는 것인데 바로 게으른 혼삶러에게 강제적 아침 루틴이 시작된 것이다. AAutumn in New Yorkutumn in New YorkAutumn in New YorkAutumn in New Yo
굳이 내가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리처드 기어까지 소환하면서 센트럴 파크의 가을을 끄집어낸 이유는 이렇게 전혀 자발적이지 않은 아침 루틴에 낭만 한 스푼을 더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유치할까? 반 강제적이니 아침마다 나는 고민에 쌓인다. 날도 추운데 오늘은 건너뛸까? 오늘은 오래 혼자 둘게 아닌데 집에서만 좀 놀아만 주고 말까? 그런데 어김없이 산책을 빼먹은 날엔 코코가 뭔가 스트레스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더 드는 건 내가 예민한 탓인가? 참 뭉그적 뭉그적 게으름이 끝이 없다. 그런데 막상 부스스 일어나서 공원에 가면 난 그대로 뉴욕의 센트럴 파크 앞에 있는 느낌이다. 어디 집 앞의 코딱지만 한 공원을 센트럴 파크에 비유할까? 그런데 그냥 그 쌀쌀한 느낌이 싫지 않다. 센트럴파크 낙엽은 뭐 별 다르나? 다행인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자연 그대로의 공원이 집 앞에 있으니, 이건 또 얼마나 행운인가! 날리는 낙엽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폭신폭신 쌓인 낙엽들 사이로 코를 킁킁거리며 마음껏 뒹굴 수 있는 코코는 얼마나 행운인가!! 조금 뭉그적거리는 게으름을 떨치기엔 꽤나 이상적인 루틴이다.
이제 계절은 겨울이다. 얼마 전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던 잎들도 이젠 거의 다 떨어져 가지는 앙상하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아침 루틴은 더 게을러진다. 부스스 세수도 안 한 얼굴로 두툼한 파카에 목도리까지 칭칭 두르고 나서는 게 더 어려운 계절이다. 그래도 루틴은 지켜야한다. 나는 전 보다 더 잰걸음으로 "한 바퀴만 돌자" "빨리 가자" "집에 가자" 코코를 몰고 다니지만 그래도 이곳은 내게 여전히 센트럴 파크이며 낭만적인 아침 루틴을 강요하는 혼삶러의 또 다른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