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쥐어주거나, 나침반을 주거나.
리더의 유형을 분석하는 책이나 칼럼은 정말 많다. 어떤 리더가 구시대적이며, 요즘 시대에 맞는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해야하는 지까지 조언한다.
이론은 잘 모르겠고, 내가 피부로 겪어본 다양한 리더들은 결국 2가지 유형으로 귀결되었다. 스스로 나름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해서인지, 직장 고민이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자주 꺼내는 말이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구분은 마땅히 리더로 인정할 만한 사람이라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별로 리더의 자질이 없는 거다.
지도를 잘 그려주는 리더는 두뇌형/전략형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스마트한 느낌이 물씬 풍기고 머리가 좋다. 빠르게 a안,b,c‥전략들을 생각 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상황을 넓게 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비즈니스의 기회를 선제적으로 잡고 입지를 다지는 역할을 잘 한다. 그래서 이런 리더는 지도를 손에 쥐어준다.
길은 어디든지 있어, 위험도 어디든지 있지. 어디로 갈래?
하지만 지도는 말 그대로 지도지, 가야할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네비게이션을 탑재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지도형 리더는 기회와 가능성을 많이 볼 줄 알기 때문에 반대로 어느 하나에 선택과 집중을 온전히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즈니스의 포트폴리오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 포트폴리오가 그려진 지도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는 실무자인 나에게 달려있다. 이건 사실 엄청난 부담이고 머리가 아픈 일이다. 지도에 나있는 길 하나하나가 말이 되고 논리적일 수록 더 힘들다. 길을 선택함에 있어 기회와 위험 모두를 안고 가는 사람이 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인 책임은 리더에게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무자인 내가 스스로 선택을 했다고 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조성된다는 점이다)
주체적인 생각과 고집이 부족한 실무자는 이러한 리더 아래서 왠만해선 오래 못 버틴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부담스러워서 못한다. 과로가 아니라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적응을 잘 하는 실무자도 꽤나 훈련이 필요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많은 가능성 사이에서 어차피 정답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기만의 세계(생각,고집,가치관)를 정립 해 가야한다.
지도를 주는 리더는 티는 안 나지만 꽤나 겁이 많은 경우가 있다. 사실 어디로 가야할 지 잘 모르겠으니까 지도만 그려주고 있는 거다. 모른다는 뜻은 그 방면에서 바닥부터 뛰어봤던 실전형 경험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그 업계 저명한 인사들에 인사이트를 구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말 몇마디에 포트폴리오가 쉽게 뒤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실무자들은 혼란스러워한다.
물론 끊임없이 변모하는 비즈니스 시대에 발 맞춘 유연한 경영은 언제든 환영이다. 하지만 그 방향의 전환이, 방향키를 잡고 있는 선장의 결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난데없이 등장한 손님에 의해 좌지우지 될 때 노 젓는 선원들은 뭔지 모를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는 거다.
저는 이런 판단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도를 제대로 그려줄 줄 아는 리더는 그렇게 흔치 않다. 존경할 만한 구석도 많다. 그럼에도 문득 소화불량이 걸릴 것 같다면, 그나마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先(선)정립 後(후)질문이다. 지도를 그려준 리더에게 끊임없이 리더 스스로의 생각을 여쭤보라.
로봇이 아닌 인간이기에, 그 과정에서 리더의 선호도가 조금이나마 드러날 것이다(물론 "a인 경우에는 b이고, a'인 경우에는 c인데 생각을 말하는 게 의미가 없지"라는 둥의 회피성 논리가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황판단과 자기생각정립이 빠른 편인 실무자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일의 정신적인 체력이 꽤나 강해야 한다.
반면 나침반을 쥐어주는 리더는, 내 경험상 바닥부터 실무 커리어를 쌓아 베테랑 내공이 강한 사람이다. 오랜 시간 특화된 경험치와 인맥을 가진 나침반형 리더는 동물적 감각이 강하다. 이러한 역량은 지도형 리더에게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방향 제시가 비교적 명확하고 결단력과 고집, 카리스마가 있다.
적어도 이러한 리더 아래서 일하면 답답함은 없다. 나침반 리더가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이면 그 아래 실무자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년에 걸쳐 쌓아 온 살아있는 경험과 노하우를 대체 어디가서 배운단 말인가.
이 길로 가야만 하는 당위성은?
문제는 나침반형 리더가 전체적인 맥락을 설명하는 것에 소홀하여 그 길에 대한 공감대가 떨어질 때 발생한다. 그냥 가라고 해서 가는데 속으로는 "저 길이 더 맞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 부터가 재앙의 시작이다.
사실 나침반형 리더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다. 홍시맛이 나서 홍시가 들어갔다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하면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될 지 난감해지는 거다(약간 권위적인 리더라면 "내가 왜 너한테 당위성을 설명해야하니, 그냥 좀 해" 라는 생각이 들 지도 모른다).
자기생각과 고집이 생기기 시작한 실무자라면, 더욱 반감이 생기기 쉽다. 상황이 악화되면 서로 소통은 없어지고 실무자는 본인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기'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성과가 난 뒤, 리더가 나의 방향에 대해 '네가 맞았다'라는 표현을 할 때마다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리더와 실무자 사이의 긍정적인 선순환이 결코 아니다. 열정이 아닌 오기로 일하고, 보람이 아닌 희열을 느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래 가지도 못할 뿐더러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이다(예전 직장에서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라는 사람은 또 그렇게 할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스스로의 그릇이 작음을 깨닫게 될 뿐이다).
나침반형 리더는 좀 더 친절해 질 필요가 있다. 더 정확히는 공감능력을 키워야 한다. 눈높이교육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설탕이 아니라 홍시맛이라고 느낀 이유를 최대한 설명하기 위해 노력 해 보아야 한다. 과거에 홍시를 설탕이라 판단했던 서투른 시절을 떠올리면서라도 말이다.
설명은 쉬운 단어로 쉽게 말할 수록 더 깊이 알고 있다는 뜻이며, 앎은 배울 때가 아니라 가르칠 때에 더 깊이 체화된다. 상대방이 공감을 못 느끼거나, 스스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어쩌면 외곬수처럼 본인의 영역만 키워온 사람일 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스타플레이어일 지는 몰라도 스타리더는 못 된다. 슬프게도.
사람은 참 간사해서, 나침반형 리더와 일할 때는 지도형 리더가 필요했고, 지도형 리더와 일할 때는 카리스마 있는 나침반형 리더가 그리워졌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2가지 유형 중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언젠가 리더가 된다고 생각할 때, 둘 중에 어떤 유형을 선택하고 싶은가? 이게 과연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지 자체가 사실 좀 의문이다. 선택을 스스로 한다기 보다, 오히려 지금껏 살아 온 본인의 기질과 성향에 의해 자연스럽게 둘 중 하나로 정립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