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가 제일 좋다
승무원이면 다들 외향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향적인 승무원들도 엄청 많다. MBTI 얘기를 빼먹을 수 없는 게 내가 살면서 만난 승무원들 중 가장 많은 MBTI는 ENFP 제일 독보적이었고, 그 뒤로는 나처럼 INFP, INFJ, ENFJ, ESFP 가 뒤를 이었다.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힘)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꼭 꼭 꼭 필요한 나에게 코로나 시국 스태프 트래블을 대신해서 또 다른 눈치게임이 시작했으니 바로바로 조식 시간 선정이다.
물론 마음 맞는 동료가 있어서 레이오버 때 같이 나가는 것도 너무 좋다. 코로나 이전 나는 전 회사 다닐 때 100시간짜리 보스니아 사라예보 레이오버를 받아서 친한 부사무장 한국인 언니랑 같이 크로아티아 여행을 한 적도 있고, 체코 프라하 레이오버를 친한 필리핀 부사무장 친구랑 같이 받아서 팁 투어도 듣고 맛집도 다니면서 엄청 즐겼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대. 앞에선 나한테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도 내가 호텔 밖으로 나갔다고 하면 뒤에서 누가 날 회사에 리포트할지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아직 회사에서 호텔 밖으로 나가는 걸 금지시키고 있고, 이것 때문에 리포트당한 동료들 많이 잘렸다)
나는 태생이 집순이, 동네 순이라 호텔 안에만 있는 게 힘들지 않았는데, 그런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으니 바로바로 호텔 조식이다.
아웃 스테이션에 도착하면 가족이랑 짝꿍이랑 영상 통화를 하고, 블로그도 하고, 넷플릭스도 보고, 반신욕도 하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정말 정말 잘 간다. 특히 유럽행 비행은 아침 5-7시 리포팅 시간이 대부분이라 비행 준비하려면 새벽 3-5시에는 일어나야 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행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로 호텔에 도착하면 잠만 자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식만은 혼자서 여유롭게 즐기고 싶어서 내가 선택한 전략은 조식 시간 시작하자마자 가는 것. 보통 조식 시간이 현지시각으로 오전 여섯 시나 여섯 시 반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동료들 아무도 안 마주치고 당연히 혼자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전략은 한 70%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어느 날, 호텔 방 문 밖을 나오자마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기장과 마주쳤다. 나이 많을수록 아침잠이 없어진다는 것을 (나처럼) 깜빡했다.. (에티하드항공의 파일럿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다) 결국 부기장이랑 같이 1층으로 조식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메뉴를 주문하고 난 뒤 진짜 한 5분도 안돼서 기장님도 오셔서 같이 합류했다. 결국 혼자 여유롭게 먹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날은 외국인 기장님의 첫 보잉 비행 날이었다. 30년을 에어버스 기종만 운항하다가 보잉으로 넘어와서 아직 적응이 안 된다고 에어버스 비행기 찬양만 엄청 하셨다. 그리고 부기장은 에어버스는 플레이스테이션 같고 보잉이 진짜 파일럿들이 하는 비행기라며 보잉이 더 낫다고 침 튀기며 얘기하고, 가운데에 낀 나는 열심히 들어주기만 했다. 혼자서 조식 먹는걸 제일 선호하지만 사실 이 날 대화가 재밌어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물고, 동료들끼리는 마음 맞는 사이가 아니라면 할 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은 누군가랑 대화하면서 먹는 게 나을지도... 아니다, 친한 친구가 아니면 여행이 아닌 비행 아웃 스테이션 호텔 조식 식당에서는 안 마주치는 게 나을 거 같다. (그게 회사 동료라면 더더욱)
코로나가 얼른 끝나서 호텔 조식이 아니고 호텔 밖에 나가서 여유롭게 아침 좀 사 먹고 싶다. 이탈리아에서 크로와상에 카푸치노도 좋고, 프랑스에서 버터와 살구 쨈을 곁들인 바게트와 직접 짠 오렌지 주스도 너무 좋다.. 혼자서 정말 야무지게 잘 놀 수 있는데 요새는 매일 회사 숙소-비행기-호텔의 사이클이 반복돼서 아쉽기만 하다. 다음 비행에서는 아~~ 무도 안 마주치고 혼자 여유롭게 조식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