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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외롭다. 날 달래준 건 라면.

by 수평선너머

혼자 점심을 먹은 지도 2주가 되어간다.


10년 넘게 점심을 급식으로만 먹다가, 매번 밥을 사 먹으려니 조금 낯설다.


지난 2주 동안 참 다채롭게도 먹었다. 서브웨이, 김밥, 버거킹, 맥도날드, 볶음밥, 돈까스, 파스타, 비빔밥 등등. 조만간 평일 점심 애슐리 퀸즈에 혼자 들어가 볼까 생각 중이지만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잠시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혼자’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혼밥이 낯선 40대는 식당 안을 둘러본다. ‘여기 혼자 먹어도 되는 곳일까? 빈자리가 하나뿐이면 괜히 신경 쓰이고, 그 자리가 4인 테이블이면 기껏 찾아온 맛집이라도 발길을 돌릴 때가 있다.


어느 날은 작은 돈까스집에 들렀다. 테이블이 5개 남짓한 가게였다. 점심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라, 식당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4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 앉았다.


곧이어 ‘딸랑’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든 테이블이 찼다. 뒤이어 들어오는 손님들은 빈자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발길을 돌렸다.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그때부터 급하게 밥을 먹었다. 돈까스의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먹고 나왔다. 천천히 먹으려니 나 때문에 손님을 놓칠 사장님이 마음 쓰였다. 그날은 하루 종일 속이 거북했다.


생각해 보면, 그날 내가 눈치를 본 건 사장님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나 혼자 스스로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2주 동안 서브웨이를 2번, 버거킹을 1번, 맥도날드를 1번 갔다. 아르바이트생이 계산대에 있고, 혼자 밥을 먹어도 눈에 띄지 않았다. 키오스크를 이용해 주문하면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안심이 됐다. 내가 혼자여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 전에는 혼자 먹는 게 당연했는데, 그 몇 년 사이 혼자 먹는 게 어색해져 버렸다. 아니, 사실 지금도 저녁은 아내와 함께 먹는다. 아침과 저녁 사이의 짧은 ‘혼자’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급식을 먹을 때면 얼마나 부러워했던 순간인가?

‘오늘은 뭐 먹지?’라고 고민하며, 맛집을 찾아가는 회사원을 부러워했다. 밥 먹다 싸우는 아이, 밥 다 먹고 운동장 가서 싸우는 아이들... 그 뒤처리를 하며 급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때, 얼마나 고대했던 '조용히 혼자 밥 먹는 시간'이던가?


그런데 막상 찾아온 ‘혼자 밥 먹는 시간’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물론 나쁘지는 않았다. 맛에 온연히 집중할 수 있었고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함께 먹는 것’이 기본이 되었나 보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말다툼하는 급식의 소음이 어쩌면 내 일상의 리듬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오히려 내 마음이 짖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 안에는 외로움이 있었다. 난 그 외로움이 불편했나 보다.


요즘은 나를 제외한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내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한다. 주변의 다른 지인들도 마찬가지다. 평일 오전 한가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는 한 달 넘게 쉬고 있다. 글을 쓰고, 점심을 먹고, 쉰다. 그나마 글 쓰는 일을 제외하면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감정의 끄적임이지 생산적이라고 부르기 부끄럽다.


평일 오전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바쁘게 살아간다.


외로웠다. 홀로 되어 쓸쓸했다.

그 감정이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었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밥을 먹으면 배고픔이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혼자가 되면 외로웠고, 저녁에 아내를 만나거나 친구를 만나면 외로움이 사라졌다. 그 자연스런 외로움이 나는 이상하게 불편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계속 몰아붙였다. 외로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도서관으로 향하고, 글을 쓰고, 혼자 점심을 먹는 일상이 2주째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이 무거웠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무거웠다. 아내는 출근을 했고, 나는 집에 머물렀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침대에서 웹툰 몇 개를 뒤적이다 다시 잠에 들었다.


12시였다. 배가 고팠고, 점심 약도 먹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건강을 위해 채소 위주의 식단을 챙겼다. 점심에 먹고 싶은 메뉴가 채소가 없을까 봐 방울토마토나 오이를 챙겨서 식당에 가기 전에 먹기도 했다. 그 모든 게 귀찮았다. 부엌으로 가서 라면을 찾았다. 눈에 ‘진라면’이 들어왔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붉은 라면은 다르다. 누군가는 신라면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안성탕면이나 진라면, 삼양라면을 좋아한다. 나는 가리는 라면이 없었다.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스낵면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이유는 2분 만에 완성되는 그 짧은 조리시간에 있었을 뿐이지 라면을 가리지는 않는다.



진라면 봉지를 뜯었다. 조리법에 적힌 500ml에서 50ml 부족한 물을 냄비에 부었다. 스프와 건더기, 면을 모두 넣고 끓였다. 면이 풀어지기 시작할 때 계란 하나를 깼다. 국물이 약간 탁해지며 노란빛이 번지도록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국물과 계란이 섞이는 것을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국물의 매콤함을 눌러주는 계란의 중화된 맛이 좋다. 4분이 정시간이지만 3분만 끓이고 불을 껐다. 면이 덜 익은 채로 남아있는 그 꼬들함이 좋다.


잠에서 덜 깨 머리는 비몽사몽인데 아무 생각 없이 내 취향에 따라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이 흘렀다.


라면만 들고 식탁으로 갔다. 라면을 접시에 한껏 옮겨 후후 불고는 입안에 가득 넣었다. 입안 가득 오물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짭조름하고 얼큰한 맛이 혀에 번졌다. 세 번쯤 젓가락질을 하니 면은 사라졌다.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냉동실에 현미밥이 있지만 오늘은 그냥 백미가 먹고 싶었다. 2분 후, 햇반을 꺼내 라면 국물에 넣었다. 밥보다 양이 많아 넘치는 국물은 버렸다. 자작한 느낌이 좋다. 냉장고에서 배추김치를 꺼냈다. 밥 한 숟가락을 떠서 김치와 함께 씹었다. 국물이 밴 밥알이 입안에서 사라졌다. 뜨겁고 짠맛이 남았다. 그게 이상하게 기분 좋았다.


몸에 나쁜 것을 잔뜩 먹어버렸다. 과식으로 몸은 무거운데 왠지 마음은 상쾌했다. 모양새는 우스웠다. 머리는 한쪽이 눌려있고, 수염은 거뭇거뭇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밥을 먹었는데 외롭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무슨 차이일까? 식당에서 혼자 먹을 때와 집에서 라면을 먹을 때, 똑같이 혼자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왜 나는 괜찮았던 걸까.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일까?


수술이 끝나고 주어진 이 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글 쓰면서 감정 정리했어.”, “점심시간에 맛집 찾아서 다녔어” 등등, 난 그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고, 평소에 할 수 없는 걸 하면서 보냈다고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정작 나 자신은 그런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몸이 아팠고, 쉼이 주어졌고, 그냥 쉬면 되는데 왜 그 시간을 ‘아깝지 않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나는 자꾸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다.


어쩌면 그게 나를 가장 지치게 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자, 외로움은 여전히 있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그제야 방 안의 고요가 고요로 들렸다. 쉼이 멈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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