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한 정신과 비천한 몸뚱이
대부분의 여성이 20세에서 40세 사이에 아이를 낳는다. 범위를 넓게 잡는다고 해도, 15세에서 50세 사이가 될 것이다. 이 나잇대가 임신이 가능한 연령인 데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생애사에서 지나치게 미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직 노쇠하지도 않은 신체적 전성기를 맞아야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리적 부담을 짊어질 수 있다. 그래서 아기를 낳는 시기의 사람들은 (나이로 따졌을 때) 기본적으로 건강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이유로 육신의 중요성을 가장 체감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젊은이의 삶은 충분히 비정하지만, 그렇다고 목숨, 신체와 같은 가장 본질적인 것들이 시시각각 위협당하지는 않는다. 조선 시대만 해도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고, 지금으로부터 두 세대 전만 해도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장애를 입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젊은 꼰대라고 비아냥댈 수 있겠지만, 일상의 물리적 위협이 지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훌쩍 늘어난 평균 수명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환경에서 청년들은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단, 재생산은 종류가 약간 다른 종류의 경험이다. 임신-출산-육아에 돌입하는 것을 기점으로 생존하고 버티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현대의학이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긴 하지만, 출산은 역사적으로 꽤 위험한 일이었다. 조선 양반 여성 중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비율이 13%라는 기록이 있다. [1] 임신 기간에는 면역력을 비롯하여 여러모로 신체 능력이 떨어지며 각종 불편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 (임신의 괴로움이 입덧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착각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미약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가련한 존재들은 혼자서는 먹고 자고 싸는 것도 해결이 불가능하다. 아기를 낳는 주체와, 태어난 아기 양 쪽 모두 커다란 신체적 취약성을 지니게 된다. 물론 목숨이 위협당하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에서 드문 일이니, 일상적 불편함을 예로 들어 보자. 위의 사진처럼, 나도 애 낳기 전에는 종종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여유롭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런데 임신하고 만삭일 때는 초록불이 켜진 시간은 길을 건너기에 모자랄 만큼이나 걸음이 느려졌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모양새는 영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렸다. 스마트폰이 웬 말! 산부인과 의사로서 산모를 수없이 봤지만, 내 몸이 실제로 약해짐을 체감하니 덜컥 겁도 났다.
도시 문명인들은 육신에 의존도가 적다. 우리 중 누구도 오늘 점심거리를 직접 사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심코 몸을 경시하다 못해, 고작해야 뇌를 담는 그릇 정도로 쳐줄 뿐이다. 결국은 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마치 영원히 젊고 건강하게 살 것처럼 행세한다. 이렇게 인간의 취약성, 육체성이 수면 밑에 가려져 있다가 갑자기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재생산이다. 임신하면 평범한 신체활동에도 쉽게 지칠 수 있다. 출산의 고통은 오롯이 몸으로 겪어야 한다. 신생아를 안고 업으려면 근력이 필요하다. 고된 육아로 쪽잠만 자면서도 버티려면 체력이 최우선이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미적분, 토익 점수,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다. 강인한 근력, 태평양 같은 인내심, 무쇠 같은 체력과 풍부한 경험치이다. 이제 나의 두 돌배기 아들놈은 힘이 망아지처럼 세 졌는데, 이 녀석을 상대하려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박사 학위가 아니고 통증이 없는 튼튼한 허리이다.
만약 몸을 몸매 관리의 대상 정도로만 취급한다면, 이 커다란 괴리가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개인적으로 예쁨이나 마름이 아닌, 신체의 강건함을 젊은 시절부터 남녀 모두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길러냄에 있어서는 육체가 이중으로 중요해진다. 이것은 낳는 이뿐만 아니라, 태어난 이들의 결정적 성장도 오롯이 몸으로 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유아기 아이들은 자신의 몸뚱이가 교과서이다. 핥고, 쥐고, 뒤짚고, 기고, 빨고, 구르고, 던지고, 걷고 달리며 신체 조절 능력을 익히는 것은 유년기 발달의 핵심 중 핵심이다. 그렇게나 잘났다는 인간의 뇌마저도 바로 이 작업을 위해 고도화되었다는 이론이 지배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외우고 연산하는 일이 뇌의 존재론적 목적인 것처럼 여긴다.
한편, 몸에 대한 경시는 부분적으로는 과도한 성적 경쟁 때문일 것이다. 10대 - 20대에 가장 중시되는 것은 성적과 학벌, 스펙이다. 몸을 써서 활동하고 직접 경험을 축적하기보다는, 책상머리의 지성 활동을 높게 쳐주는 것이다. 영유아기, 출산, 노화와 같은 결정적인 취약 시기를 오롯이 육신으로 버텨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리 합리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왜 그렇게까지 지성 활동에만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일까?
<참고 문헌>
[1] 김두얼. 행장류 자료를 통해 본 조선시대 양반의 출산과 인구변동. 경제사학.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