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말 안 통할 때 도망쳐 달려 달려

사춘기에도 효과 있나요?

by 카피자


엄마, 나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어.
나 수학학원 그만 다닐래.
음악 하고 싶어. 음악학원 보내줘


1

고등학교 1학년 올라가는 딸, 어느 날 작심한 듯 말했다. 요 며칠 할 말 있는 듯 멈칫거리더니만. 다짜고짜 한 말, 평소와 다른 표정이었다.

느닷없는 그 말에 나는 머리가 멍했다. 당황한 기색부터 감춰야 했다. 학원과 공부, 진로와 미래. 내신과 대학. 부모로서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것들. 하지만 아이는 오랫동안 생각해 온 눈치였다. 1시간 동안 서로 옥신각신 대화를 했다.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2

음악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니? 고리타분한 부모 마인드가 욱욱 올라왔다. 하지만 현실에 닥친 어느 부모라면 이 상황을 쉽게 오케이 할까?

다음 날, 아이 책상엔 책상 위엔 꾹꾹 눌러 적은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공부 안 할 거다. 음악을 하면서 돈을 덜 벌더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라고 적혀 있었다. 노트 속 빼곡히 적힌 음악 가사, 악센트 표시과 함께.


3

사춘기와 사십춘기의 갈등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운동화끈을 매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길거리로 뛰쳐나와 달렸다. 하늘과 바다를 보며 계속 달렸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은 해야지. 수학 포기하면 내신은 어떻게 받냐, 대학은 안 갈 거냐, 온갖 잔소리가 맘속을 맴돌았다. 그럴수록 발에 힘을 주어 더 땅을 박차고 달렸다.


한참 달리기로 숨이 찰 때 전화가 왔다. 친정엄마였다.


4

달리는 도중 헉헉대는 목소리로 받은 전화. 숨소리를 들은 엄마는 폭풍 잔소리를 쏟아냈다.


또 달리기냐,
퇴근하면 쉬어야지 몸상하게 왜 달리냐,
달리기 그만하고 어서 집에 가라,
늦은 시간에 위험하게 달리기 그만하고,
어서 집에 가, 어서.


엄마는 사십춘기 딸을 두어도 영원히 엄마인 걸까? 엄마 잔소리는 기본값인 걸까? "달리기가 뭐 어때서? 여기 하나도 안 위험해. 달리기를 해야 몸이 안상해. 달리기를 해야 건강해지지" 사십춘기 딸의 말은 먹히지 않았다. 잔소리에 겨우 네네하고 전화를 끊고, 나는 계속하던 달리기를 했고.


5

부모님이 사시는 곳은 밤이 되면 주변이 캄캄하고 인적이 드물다. 부모님 입장에선 퇴근 후 밤 8시~9시에 달리기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무 위험하고 피곤하고 딸이 걱정되는 일이 맞다. 하지만 내가 있는 광안리 해변가는 한밤에도 휘황찬란하게 불이 밝다. 관광객도 많고 달리기 하는 사람도 많다. 부모님이 그걸 모를 뿐. 그저 걱정되어 달리기를 그만하라고 재촉할 뿐.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달리기를 할 뿐.


6

달리기를 하며 다시 딸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나는 딸에게 뭘 하고, 뭘 하지 말라고 했던 거지?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AI 시대에 대학, 학위, 지식, 성적, 암기, 등수보다 중요한 것이 분명 있을 텐데, 나는 왜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했던 걸까?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하고 싶은 게 생겼다면 그것을 시대에 맞게 표현할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보는 것도 엄마 역할일 텐데..


달리기도, 생각도 계속했다.


7

집에 와 샤워 후 여행 프로그램 '풍향고 2'를 봤다. 유재석, 지석진, 양세찬, 그리고 배우 이성민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여행하는 좌충우돌 여행기다. 멤버들이 헝가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성민이 대학 원서를 쓸 때 이야기다. 이성민이 연극영화과를 지원하려고 하자, 아버지는 대학원서를 찢어버리고 돈을 주며 여행이나 가라고 했단다. 아버지의 반대로 연극영화과를 가지 못했지만, 결국 극단 모집 광고를 보고 몰래 연극을 시작한 이성민,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다 안다. 지금은 대한민국 명실상부한 대배우가 되어 있다는 것을.

image.png


9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 딸아이는 음악을 하고 싶고, 나는 달리기를 하고 싶고, 이성민은 연극이 하고 싶었다. 막는다고 막아질까? 나는 딸아이의 말을 떠올리고, 달리기를 실컷 하고 온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성민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오버랩되었다.


10

나는 내 식대로 아이는 아이 식대로, 각자 자기만의 길을 달려가는 것이구나. 달리기는 인생의 많은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해 주었다. 아이의 삶은 아이의 것,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아 달려가는 게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닿았다. 아이와 조금 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해야겠다. 물론 무조건 하고 싶은 것만 하려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것도 아니다. 현실과 타협할 줄 알면서도, 인생이란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사는 거니까.



https://brunch.co.kr/@folsy/92



https://brunch.co.kr/@folsy/93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번아웃일때 시작한 이상한 사진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