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축
2025년 8월, 동네 공원
평범한 목요일,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는 무료하다.
"우리 오랜만에 공원 갈까?"
나의 제안에 두 남자가 들썩인다.
남편은 얼른 재택근무를 마무리하고 나와 어질러진 부엌을 정리하고
아이는 공원에 가져갈 자동차들을 엄선하기 시작한다.
구름이 선명한 선홍빛을 머금었을 즈음
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몰이 뿜어내는 오늘의 마지막 빛을 등에 업고
페달 없는 자전거를 타느라 신이 난 아이의 뒤를 쫓았다.
왼쪽으로는 잔디밭과 인공폭포,
오른쪽으로는 어린이 놀이터가 자리한 명당을 잡고
땀 식힐 새도 없이 아이 입에 삶은 계란을 넣어준다.
남편과 나도 햄버거를 하나씩 들고 아무렇게나 앉아먹는
여름밤, 습습함 그러나 싫지 않은.
놀이터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몇몇
시시하다는 듯 몸을 털털 헐렁이면서도
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다.
누워서도 탈 수 있는 동그라미 바구니 그네에 누워
흔들흔들
세상 한량없이 흔들거리고 있는 10살 정도 여자아이,
그리고 그런 아이의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엄마가 있다.
"가자. 가자고. 가자니까? 지금 벌써 여덟 시야.
엄마가 너 이거 언제까지 기다려. 이거 그네 멈출 때까지 탈 거야?"
짜증과 애원이 섞인 말투,
흑단 같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엄마의 동동거림에
나의 시선이 거기 멈춘다.
수 분이 지나 겨우 내려온 아이의 손을 냉큼 잡고 가자! 하는데
바로 옆 그네에 다시 냉큼 올라타면서
"어. 요것만 타고 갈게."
"하우 너 진짜 왜 그래? 아 난 몰라! 너 혼자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응, 아니야~"
응 아니야~ 가 어찌나 느긋한지
훔쳐 듣던 내가 약이 오를 정도.
"핸드폰도 없는데 뭐 혼자 잘도 찾아오겠다. 난 몰라"
엄마는 혼잣말을 들으라는 듯 크게 하고는
그대로 뒤로 돌아 직진한다.
뒤 돌아보면 지는 거라 생각 중인 게 분명하다,
절대 뒤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렇게 엄마는 아이를 두고
내 앞을 지나 왼 편으로 이어진 길을 걸어갔다.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아이를 봤다.
조금은 동요하나 했는데 웬걸,
그대로 남아 그네를 구르기 시작한다.
엄마의 다짐이 무색하게 엄마를 한 번을 안 찾네.
딱 봐도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나른함,
끼이익 그네소리 마저 게으른 진자운동을 보노라니
생면부지 저 엄마의 심경이 오죽할까 싶어진다.
나는 다시 왼쪽으로 시선을 옮겨 아이 엄마가 어디까지 갔나 찾았다.
아이의 엄마는 그렇게 공원을 반 둘레 빙 둘러
여기가 안 보이는 지점까지 가서는 멈춰 서더니
놀이터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툭 떨군 양 팔의 모양새에서 그녀의 어이없음과 무력함이 느껴진다.
'어휴..!'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도록 한숨을 푹 쉬며
인공폭포 앞, 벤치에 털썩 앉았다.
"나도 그네 탈래!"
놀고 싶은 마음에 허겁지겁 식사를 대충 마친 태은이가
누나 옆, 비어있는 그네로 달려간다.
"어, 잠깐만. 아빠는 아직 다 안 먹어서. 태은이 혼자 타고 있어 봐."
짤뚱한 다리를 쭈욱 폈다가 훽 접고,
또 쭈욱 폈다가 훽 접고..
영 속도가 나질 않고 그네 진자의 반경도 변화가 없다.
"아빠아 도와줘!"
아이의 성화에 남편은 두 세입 크기 남은 햄버거를
한입에 욱여넣고 그네를 밀어주러 간다.
아빠가 오자 그제야 바람 쌩쌩 그네를 구르며 신이 난 태은이,
혼자 남은 여자아이는 옆에서 안보는 척, 몇번 그 모습 훔쳐보더니
미련없이 훌쩍 그네에서 내려버린다.
'오 이제 가려나?' 했지만
또 바로 옆 놀이기구를 느그적느그적 타고 놀고는
드디어 놀이터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엄마 있는 곳 반대방향 어둠 속으로 두리번두리번 사라진다.
'어어 그리로 가면 안 되는데..'
소소한 동네 공원 운동기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맨발 자갈밭을 지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갔다
어쩌지, 알려줘야겠다! 하는데
왼편에서 씩씩대며 엄마가 다시 등장했다.
"그, 아이 저 쪽으로 갔어요!"
".. 아 네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1g만큼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그 감정은 어쩌면 연대의식이었을까.
내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저 모녀가 생이별할 일은 아니었겠지만
다시 돌아온 그녀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참견이었다.
작은 언덕을 가운데 두고 반대 방향으로 돌며
서로를 찾는 모녀가
두어 바퀴를 헛돌다 겨우 만나는 모습을
정자에 앉아 고개를 쭉 빼고 지켜봤다.
"너 뭐야, 엄마 저기서 계속 기다렸거든?"
아이를 잠시나마 시야에서 놓쳤던 불안과 다시 만난 안심이
짧은 타박 속에 묻어난다.
아이는 엄마가 안 보여도 놀라지 않고,
엄마가 다시 나타나도 별 감흥이 없어 보인다.
"엄마, 이거 딱 한 번만! 진짜!"
하며 구름다리에 매달리려 하자
"... 종아리 맞을래?"
하는 엄마의 대답과 함께
모녀는 이제 함께 엄마가 혼자 갔던 길로 걸어간다.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이 왠지 애틋하다.
페이드아웃 되어가는 대화를 조금 더 듣고 싶은데..
"... 아빠도 기다린다고 했잖아."
"응, 엄마 물 없어?"
"아 없어. 아까 그 물이 다야, 너.. 집에 가서 먹어!"
"아 목마른데.."
"엄마도 저까지 갔다가! 지금, 어?..."
나는 그들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았다.
투덜대면서도 딸 곁에 딱 붙어 걷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팔짱 낀 딸,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뒷모습도 닮아있다.
"엄마아!"
묵직한 공기를 가르는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 새 아빠와 공놀이를 하고 있던 태은이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10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리를 전력질주로 달려와서는
그대로 안겨버리는 박력,
이마며 콧잔등이며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짭조름하다.
"나 너무 더워서! 물 좀 줘, 지인짜 시원한 물!"
얼음컵에 보리차를 따라주자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마시면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인다.
발그레해진 양 볼 덕분에
아이의 그림체만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우리 가족 다함께 공원 오니까 정말 행복해!
난 엄마가 너무 좋아, 아빠도 너무 좋아!
우리 가족 사랑해!"
양 팔로 각각 내 목과 남편 목을 감아
기어이 뜨끈하고 축축한 삼인허그를 하고는
"미끄럼틀 탈래! 엄마아빠! 밑에서 나 봐봐!"
후다닥 다시 저만치 달려가는 아이를 보며
더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뒤를 따랐다.
언젠가 너도 "응, 아니야~" 할 때도 오겠지.
그렇게 갔다가 그래도 또 이렇게 돌아오렴,
그때는 엄마가 전력질주로 마중 나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