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쓱했지뭐야
2025년 9월, 헤어숍
지난 여름의 일이다.
머리가 길어 자를 때가 되었다.
보통은 남편이 아이를 보는 동안 짬을 내어 다녀오곤 했으나
그날은 평일이었고
그렇다고 그 주말에는 여행이 잡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아이와 둘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분리불안이 심한 것도 전혀 아니고
기관에 다니고 있지는 않지만
나와 잠깐씩 떨어져 혼자 있는 상황을 어려워하는 성향은 아니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샵에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나요?"
"가영원장님 커트 예약이요."
"아, 원장님 지금 마무리 중이셔서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네. 태은아, 이리 와. 엄마랑 여기 앉자."
곧이어 간단한 음료와 과자 등이 정갈하게 놓인 잔식이 제공됐다.
하얀색은 버터쿠키, 파란색은 초콜릿쿠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다! 엄마 나 이거 까줘!"
아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기 손바닥만 한 초콜릿쿠키를 오물거렸다.
"태은아, 엄마 머리 자르는 동안 혼자 있을 수 있지?"
"응!"
"엄마 머리 금방 할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알겠지?"
"응!"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 조금 긴장하고 있구나,
깨달아졌다.
"이쪽으로 오실게요."
친절미소를 장착한 직원분의 인도에 따라 들어가
가방을 맡기고 커트용 가운을 걸쳤다.
"우리 아가는 여기 앉아있으실게요~" 하며 커다란 쿠션도 놓아주신다.
'아 쿠션 괜찮을 텐데..' 속으로 생각하는 찰나에
"괜찮아요." 하며 스스로 쿠션을 거절한다.
그런 아이에게 귀여운 듯 싱긋 웃어주던 직원분의 표정에
나는 옅게 안도한다.
"태은아, 엄마가 이거 보여줄게. 혼자 잘 보고 있을 수 있지?"
아이가 좋아하는 과학채널을 틀어주니
아이는 고만 좀 말하라는 듯 턱을 괴고
[비가 내리는 원리]에 대한 영상에 집중한다.
"샴푸실로 가실게요." 아, 이럴까봐 방금 머리 감고 왔는데..
하지만 커트 전 머리카락을 적시기는 해야 할 테니
군말 없이 샴푸실로 따라 들어갔다.
빈 의자에 앉으라는 대로 앉았더니 포근한 담요를 가져와 무릎에 덮어주신다.
의자를 젖히며 "천천히 누우실게요~" 하는 목소리,
두 눈에 보드라운 티슈가 덮어졌고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물 온도 괜찮으세요?"
적당히 따뜻한 샤워기의 물줄기가 머리카락을 적신다.
수압은 세지 않았지만 물방울이 튀지도 않았다.
매뉴얼대로 응대해 주시는 그 움직임에 친절이 가득 배어있어서
방금 머리 감고 왔으니 샴푸는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걸 잊고 말았다.
"샴푸 해드릴게요~"
아뿔싸.
태은이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노랫소리와 물소리,
거품 내는 소리와 샵 내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소리들..
앞이 보이지 않는 채로 나는 청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혹여라도 태은이가 나를 찾지는 않는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더 헹구고 싶으신 곳 있으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네에~"
커트 전 간단히 샴푸만 하려나 보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휴, 이 정도면 괜찮은걸?'
"트리트먼트 해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내 젖은 머리카락에는 트리트먼트가 발라지고 있었다.
'괜찮겠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답답하다..'
나는 두 발을 엑스자로 번갈아 꼬아가며 이 시간을 견뎠다.
"두피 마사지 해드릴게요~"
아, 이제는 말해야 한다.
아니라고,
하지 말아 달라고.
"ㄱ..괜찮아요."
"아, 괜찮으세요? 그럼.. 마무리해드릴게요~"
"(제발 빨리 좀.. 부탁해요..)"
왜 그렇게까지 마음이 안달복달 났을까.
이 평범한 응대가 과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약해 빠진 수압으로 도대체 트리트먼트는 언제 다 헹궈진다는 건지 모르겠을 정도로.
(수압은 사실 딱 적당했다.)
울화통이 치밀 정도로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아니, 애 혼자 있는 거 알면서도 이러나?!'
하지만 이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건 순전히 내가 만들어낸 마음이다,
이 분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은 커녕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계실 뿐이다.
태은이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를 찾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태은이는 괜찮다.
'혼자 어디 간 건 아니겠지? 아무도 못 본 사이에 밖에 나간 건 아니겠지???!!!!'
.
.
.
.
.
"더 헹구고 싶으신 곳 있으실까요?"
"없.습니다!"
"네에, 그럼 마무리 해드릴게요~"
드디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 눌러 물기를 털어내고
솜씨 좋게 단단히 감아 고정시킨다.
(늘 느끼지만 샵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수건으로 머리를 잘 동여매주는 걸까? 언제 한 번 배워보고 싶다.)
젖혀졌던 의자가 비로소 천천히 다시 올라간다.
드디어 두 손으로 휴지를 떼어내자 밝은 빛과 함께
혼자 앉아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들어갈 때와 동일한 자세로 턱을 괴고
과학채널에 빠져있는 평온한 모습이다.
#머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