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한다.
토요일 오후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나른한 주말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점잖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그 시간에라도 사무실에 방문하여 상담을 받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인지 판단하고 싶으니 전화상으로 먼저 이야기를 듣자고 했고 그 여자분은 다급한 사항이지만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 여자분은 어느 대형 법무법인 소속의 법조인인 듯했고, 고객의 소송 관련 증거로 제출된 계약서의 위조 여부를 가려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 계약서에 사용된 폰트가 계약 당시에 출시되지 않은 폰트인 것 같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폰트 업체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출시된 폰트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웬만한 폰트는 어느 회사의 어떤 폰트 인지가 구별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래한글 2.0이 출시된 시점에 작성된 계약서에 사용된 글꼴이 아래한글 3.1에서 처음 소개된 폰트를 썼다고 하면 그 계약서는 위조 계약서인 것이니 그 여부를 가려 달라는 것이다.
물론 남의 글꼴의 디자인을 유사하게 복제하여 자신의 글꼴로 팔아먹는 업체들도 많이 있지만, 디지털 데이터를 복제하여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복제한 것이라면, 원래의 디자인을 구분할 수 있는 요소는 어디엔가 남아있고, 전문가들이라면 이러한 부분을 구분해 내는 것도 가능하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메일로 받은 당시의 계약서에 사용된 폰트는 계약 당시에 유통이 되었던 글꼴이고, 위조의 가능성은 없는 폰트로 보여 그 여자분에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찌 되었건 문서에 특정 글꼴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문서의 제작 시점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끔 드라마에 보면 배경은 과거인데 그 시절에 발매되지 않았던 폰트로 된 광고판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소품은 고증을 했지만 글꼴에 대한 고증은 미쳐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드라마 제작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폰트 업계에 있는 것이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응답하라 1988"에서 등장한 이름표에 나온 "(예비심사)"와 "101번"의 한글들은 아무리 보아도 1980년대에 발매된 글꼴은 아니다.
그리고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편안한여행되십시오" 역시 1994년에는 볼 수 없었던 글꼴이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이유로 글꼴의 연대기가 필요하다고 하면 별거 아닌 거 가지고 까칠하게 군다고 한마디씩들 할 것 같지만, 드라마 소품 담당자의 고증 편의를 위해서나, 앞서 이야기 한 문서의 법적 유효성을 검증하기 위하여서라도 한글 글꼴이 언제 출시되어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가 정리되기를 바란다.
글자는 문서 기록의 도구이고, 글꼴은 글자가 가지는 틀이다.
글꼴이, 정리된 기록이 있는 문서도구의 틀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