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지구 May 23. 2019

맥시멀하게 생각하고, 미니멀하게 살고.

소유, 소비에 관한 축소주의 이야기




아직도 이게 있었네?


오랜만에 친정을 가면 항상 장롱 구석 깊이 모셔져 있는 추억 단지를 발견한다. 오래된 일기장,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소녀 감성 가득한 다이어리, H.O.T 브로마이드 등을 한데 모아놓은 박스가 바로 그것이다. 추억에 미소 짓는 시간도 잠시, 한걸음 물러서서 보면 추억 박스는 그저 장롱 한편에 큼지막히 자리 잡은 잡동사니로만 보인다. 내 추억의 물리적인 저장공간이 이렇게 클 줄이야. 정말 소중했다면 결혼할 때 모조리 가지고 왔겠지. 그렇다고 선뜻 버리기엔 뭔가 아쉽다.


이 모든 것들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사랑, 우정 등의 감정을 어떻게든 기록하고 전달하고 공유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마음이 전달, 공유된 후에는 매개체였던 편지 등의 물건이 과연 그 당시의 감정과 같은 취급을 받을까? 한두 개면 몰라도 아날로그 시대에 차곡차곡 쌓여온 물건들은 미안하지만, 매번 꺼내 쓰는 쓸모 있는 물건은 못된다. 사람의 얼굴이 평생 열 번 바뀌듯이 나라는 사람의 취향도 계속 바뀌어 간다. 예전에 예쁘게 보이고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이 어느샌가 추억의 대상이 아닌, 자리만 차지하는 조잡한 물건으로 느껴질 수 있다. 큰 맘먹고 처분하고 나면 은근히 기억에서 말끔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추억과 쓰레기 구별하기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 이사를 자주 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캐나다, 미국, 영국을 오가며 거주해보았고, 그 안에서도 이사를 해왔으며 현재 결혼 후에도 두 번째 집에서 살고 있다. 포장 이사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수없이 손수 짐을 싸고 풀고, 해외로 오갈 땐 특히나 소유물을 최대한 줄이고 줄여서 짐을 쌌다. 어디 떠날 생각을 하면 짐부터 싸는 생각에 아주 진저리난다. 짐 싸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다. 그 이유는 짐을 싸려들면 항상 예상보다 많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물건들을 늘어놓고 우선순위를 생각해서 싸다 보면 결국 버려지는 것들이 생겨났고, 자연스레 두고두고 추억하고 싶은 물건과 그 정도까지는 아닌 잡동사니(a.k.a 쓰레기)를 구분을 할 수 있었다. 탈락한 물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1. 별 기능이 없는 물건들(여행지 기념품, 엽서, 오브제 등)

단, 특정 지역의 디자인을 나타내면서도 제 구실이 있는 물건들은 추억을 할 수 있으면서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2. 마음은 가나 손이 가지 않는 패션템들

손이 가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이 가도, 원래 가격이 얼마이던 간에 처분하는 것이 맞다. 패션은 돌고 돈 다지만 어차피 새로 사게 된다.


3. 언젠가 쓸 것 같은 물건들

정체불명의 케이블, 단추들, 일 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이국적인 조미료들, 이런 게 우리 집에 있었나? 하는 물건 등. 그 언젠가는 오지 않을뿐더러 오더라도 새로운 물건을 구입하게 되더라.


4. 겹치는 물건들

비슷비슷한 에코백들, 조리도구, 문구류 등. 꼭 그렇게 다양하게 갖춰야만 했냐...! 이삿짐을 줄이려다 보면 한 가지 기능엔 한 가지 물건만 남기고 처분하게 된다. 어차피 자주 쓰는 건 한정되어 있다.


물건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내 개인적인 처분 대상 1순위는 기능을 못하거나 큰 가치가 없는 장식품들이었다. 예전엔 기능이 없어도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오브제 한 두 개씩 모으는 것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흐르며 취향은 변해가고, 내가 왜 이걸 샀지라는 마음도 들게 되었다. 하지만 한 때 순정을 바치고 비용을 들여 구입한 물건이 현재에도 나에게 변함없는 행복을 주고 있다면, 추가 비용을 지급해서라도 짐에 포함시켜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웬만하면 있는 거 쓰고, 반드시 필요할 때만 사기


아직도 미래에 몇 번이 될지 모르는 이사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 이제는 무엇을 사도, 과연 이 것이 몇 년 후에 쓰레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아주 유용한 자산이 될 것인가부터 먼저 따지는 습관이 생겼다. 한마디로 뽕을 빼지도 못할 바에는 집 안에 들이지 말자는 나만의 규칙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어쩔 땐 집이 휑해 보일 때도 있지만 마음만은 가볍다. 청소할 때도 참 편하다. 구석구석 뭐가 있는지 머릿속에 쉽게 그려져서 좋다. 제 기능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반 화석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물건은 몇 계절에 걸쳐 고민을 하다가 중고로 팔거나 처분한다.


눈이 계속 가고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도 일 년에 몇 번이나 입을까, 싶은 옷들은 구매하지 않는다. 로그인해서 결제하는 순간까지 갔다가 꾹 참고 세 번만 멈춘다. 그랬을 때 그 마음이 사그라들면 순간적으로 유행에 끌렸던 기분으로 넘기고, 그 마음이 오래가면 그때는 산다. 이렇게 참고 사다 보면 나름 품질을 정말 신경 쓰게 된다. 한번 사면 오래 입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고심해서 사고도 후회하는 물건이 꼭 생긴다. 한 번만 더 참을 걸, 이거 누구 줘야 하나, 라는 마음이 날 괴롭히면 다음엔 다섯 번을 참게 된다.



계절마다 옷을 정리하다 보면, 앞으로 사지 말아야 할 옷들의 기준이 생긴다.




제로 웨이스트,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면서 단아한 디자인의 아이템들이 많이 판매되고 있다. 나무 칫솔, 스텐 빨대, 다양한 에코백과 텀블러 등등. 물론 지금 당장 나에게 없는 걸 사야 할 때, 이런 다양한 친환경 아이템들을 선택할 수 있어 참 고맙다. 하지만 제로 웨이스트와 미니멀리즘을 광고로 오히려 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미니멀리스트 유튜버들과 블로거들을 보면 어찌나 다들 비슷한 아이템들을 사용하는지, 쓰던 거 모조리 버리고 트렌디한 걸로 새로 다 장만했구나, 라는 마음이 들면서 불신이 생겨버린다.


사실 친환경 제품들이 기능적으로 혁신적이라기보다, 이미 갖고 있는 거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쓴 후에 장만해도 문제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미 있는 물건인데도 불구하고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왠지 단아한 미니멀리스트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멀쩡한 물건을 버리고 '미니멀'스러운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미니멀스러운' 물건이 없어야만 되는 미니멀리즘도 존재한다. 나에게도 당연히 구매충동이 오고 굴복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문제를 유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건이 쓰레기가 되고 오물이 되어, 물과 공기와 흙에 스며들고, 다시 나에게 되돌아오는 그 순환과정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역시 최대한 갖고 있는 거 다 쓰고, 꼭 필요할 때만 새 거 사자는 마음이 들게 된다.



없는 물건을 새로 사야 한다면, 순환을 생각해서 최대한 친환경 물건을 산다.


 

버리고 싶을 땐 닦고 삶아서 한번만 더 재사용 해보자




물건을 소유하려고 하는 정도의 차이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각자 행복을 느끼는 어떤 선이 있을 것이며, 과한 느낌을 받는 선도 존재할 것이다. 마치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 그 마지노선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물건과 소유에 대한 마지노선도 개인마다 다를 것이고, 그것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과연 나에게 기분 좋은 추억이 되는 물건과 시간이 흘러 점점 쓰레기가 돼가는 물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태양에게 관리비를 납부하고 싶습니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