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orest Green
Dec 02. 2019
미운 오리 새끼라는 동화를 생각했다.
오리와 함께 자라면서
자신의 모습이 무리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미운"이라는 형용사가 된
오리보다 아름다운 백조의 이야기.
그 백조에 대해 상황을 몇 가지 가정해 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다 죽는 경우의 백조와
자신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 달라진 백조의 모습에 대해서.
그러다 나를 돌아보았다. 내 안에는
백조일 거라는 자존과
오리일지도 모른다는
열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오리로 살아가는 지쳐있는 열정과
백조임을 의심치 않겠다는 질긴 자존의 대립.
둘의 모습이 다르다 하여도
타인이 보고 있을 나는 둘 중에 어느 것일까에 대해서만 골몰하고 있는 어리석음은 둘 다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힘든 이민생활과 낯선 문화,
그리고 언어의 불편함으로
바쁘고 힘든 히루를 마치고 누워도
잠들지 못하는 밤에 가끔,
난 내가 오리 중에 끼어있는
백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매해 만나는 가을의 길목에서
함께했던 날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그리워하게 된
나의 친구와 친지와 인연들. 그리고 익숙한 계절과 문화와 언어를 동경하며 작아지고 있는 나에게
한때, 미운 오리 새끼라는 동화는
어떤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위로하곤 하였다.
그러나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의 타향살이.
여전히 타국민과 나와의 거리감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고
누가 백조이고, 누가 오리일 거라는
우월이나 비교는 책 속의 글자나,
그림 속의 음식같이 되어 버렸다.
흔히, 아픔을 겪고 일어서야 남보다 더
행복한 꿈을 꾸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꾸는 꿈은
백조가 되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싶은 우월감도 아니고
진정한 오리로 인정받아
오리들 틈에서 누리게 될 굳건한 안정감도 아니다.
단지. 지금부터 계속
나와 소통할 수 있는 나와 같은 이들과
때때로 함께 하고픈 마음뿐이다.
미운 오리로 사는 백조의 아픔은
미운 백조로 사는 오리의 처절함보다는 덜하리라.
200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