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誠意성의의 의미와 방법
주자 대학장구로는 ‘전 6장’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본대학(고본대학)에는 8조목 중 맨 앞에 있다.
먼저 번역부터 해보자.
자기의 뜻을 순수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나쁜 냄새를 싫어하듯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이 하는 것, 이것을 가리켜 스스로 흡족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기만 아는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소인은 한가롭게 있을 때는 선하지 않은 일을 마음대로 하다가 군자를 만날 때는 얼른 자신의 불선을 가리고 선한 모습만 보여주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마치 폐와 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알아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을 일러 마음에 꽉 찬 것은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신만 아는 상태를 잘 돌아보아야 한다.
증자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보고 있고 모든 손이 가리키고 있으니, 너무나 엄중하는구나.라고 하였다. 부유함은 집을 빛나게 만들고, 덕은 몸을 자르르하게 하니, 마음이 넓으면 몸이 여유로워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순수하게 해야 한다.
원문과 음독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小人閒居 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 厭然揜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소위성기의자 무자기야 여오악취 여호호색 차지위자겁 고 군자필신기독야 소인한거 위불선 무소부지 견군자 이후 염연엄기불선 이저기선 인지시기 여견기폐간 연즉하익의 차위성어중 형어외 고군자필신기독야 증자왈 십목소시 십수소지 기엄호 부윤옥 덕윤신 심광체반 고군자필성기의
원본대학에서는 ‘이것을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한다.’와 ‘이것을 일러 앎의 지극함이라고 한다.’에 이어 이 성의의 의미와 효과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성의 단락에 이어서 시경의 두 편을 인용한다. 원본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誠意 문단이 明明德보다 앞에 있고, 『시경』의 시 두 편이 성의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자는 위 성의 문단 다음에 있는 두 편의 시를 성의 단락에서 떼어 ‘전 3장’으로 배치하고, 성의 한 문단만 ‘전 6장’에 놓았다. 그러나 원본대학 저자는, 대학의 여러 행동 지침 중에 성의를 가장 중시한 것 같다. 성의 내용이 가장 많다.
此之謂自謙(謙은 겸이 아니라 겁으로 읽는다.) : 이것을 일러 스스로 흡족해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謙은 보통 겸손할 겸으로 읽는데, 여기서는 만족할 겁, 흡족할 겁으로 읽는다. 혐의 혐이라는 뜻도 있다. 혐의 혐이라는 뜻은 겸손하다 사양하다 만족하다와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만 봐도 한자의 뜻 스펙트럼이 넓은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주자가 『대학혹문』에서 보충 설명한 적이 있다. 주자가 謙(겸)을 慊(겸)으로 바꾸어 만족하다는 의미로 해석하자, 가상의 존재가 “원래 慊은 흐뭇하지 않다. 부족하다, 혐오하다 등 부정적인 뜻인데 왜 慊을 긍정적인 의미로 풀이하는지” 질문하였다. 그러자 주자는 慊의 원래 뜻은 ‘입에 무언가를 물다’라는 뜻인데, 의역하면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다’와 같은 중립적인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그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만족하다’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로 쓸 수도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 쓰인 겸손할 謙자가 겸손하다고 하면 의미가 자연스럽지 않아서 주자가 의미를 慊에 새 의미를 추가하여 謙을 해석한 것 같다.
성의의 誠은 정성이라는 뜻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진실한 것, 자신의 마음에 거짓이 없는 것,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통일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치국평천하의 근본이 ‘격물치지’인가 ‘성의’인가 하는 이해 차이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격물치지’는 인식을 강조하고 ‘성의’는 의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성의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기만 아는 상태를 잘 살펴서 조심하는 것, 신독 愼獨이다. 그다음 문제는, 어떻게 신독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주자는 경敬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敬은 공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에 잡념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제 다음 단락을 보자. 성의 단락에 뒤이어 나오는 시 두 편은 원문이 길고 어려운 한자도 있어서 여기서는 번역문만 인용한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저 기수 물굽이를 보라, 푸른 대나무가 아름답고 무성하구나. 아름다운 군자(유비군자有斐君子)여, (뼈나 뿔을 칼이나 톱으로 ) 자른 듯 (줄이나 대패로) 다듬은 듯, (옥이나 돌을 망치나 끌로) 쫀 듯 (모래나 돌로) 간 듯하구나. 엄숙하면서 두려워하고(슬혜한혜瑟兮僩兮), 빛나며 드러나니(혁혜훤혜赫兮喧兮), 아름다운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시경 위풍 기욱편)
자른 듯 다듬은 듯하다는 것은 배움을 말하고, 쫀 듯 간 듯하다는 것은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다. 엄숙하면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날까 조심한다(준율恂慄)는 것이고, 빛나고 드러난다는 것은 행동이 절도에 맞는다(위의威儀)는 뜻이다. 아름다운 군자를 끝내 잊을 수 없다는 것은 높은 덕과 지극한 선을 백성이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시경의 구절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절차탁마’가 나온다. “아름다운 군자여, 쪼갠 듯 다듬은 듯, 쫀 듯 간 듯하구나.”이다. 원문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톱으로 자르고 나서 줄로 갈고, 끌로 쪼고 나서 숫돌에 간다.’는 뜻이다. 誠意 하는 방법과 성의의 효과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절차탁마라고 하면 그냥 열심히 공부한다 또는 연마한다 정도로 생각한다. 실제로 논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인용했다.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子貢曰:「貧而無諂,富而無驕,何如?」子曰:「可也。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子貢曰:「《詩》云:『如切如磋,如琢如磨 』 其斯之謂與?」子曰:「賜也,始可與言《詩》已矣!吿諸往而知來者。」
자공이 “가난하면서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자 자공이 말하기를, “시경에 자른 듯 다듬은 듯, 쫀 듯 간 듯하다. 고 한 말입니까?” 하자, 공자는 “사(賜 자공 이름)야, 이제 너와 시를 말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말하니 올 것을 아는구나.”라고 하였다.
(*지나간 것을 말하니, 올 것을 아는구나 : 이미 이야기된 것을 말해주면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깨닫는구나.)
여기서 자공이 절차탁마를 인용한 것은 주로 수양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대학의 저자는 이것을 좀 더 세분해서 학문과 수양으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절차는 학문이고, 탁마는 수양이라고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분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절’ 한 후에 ‘차’하고, ‘탁’ 한 후에 ‘마’ 하는 것이라 ‘절’과 ‘탁’은 1차적인 과정, ‘차’와 ‘마’는 세밀한 2차 과정이지만, 절차와 탁마를 비교해 볼 때 절차에 비해 탁마가 더 깊숙이 다듬는다는 의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절차의 재료(뼈나 뿔)가 탁마의 재료(옥이나 돌)에 비해 다루기 쉽기 때문인 것 같다. 학문만으로는 지혜가 성숙되지 않는다. 수양이 병행되어야 학문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이제 위 시에 이어지는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이 시의 내용은 상당히 정치적인데, 대학의 저자는 이것을 誠意의 효과라고 생각한 듯하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아아, 돌아가신 왕을 잊을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시경 주송 열문편)
군자는, 돌아가신 왕이 현명하다고 대우한 사람을 현명하다고 인정하고 돌아가신 왕이 친하게 여긴 사람을 친한 사람으로 대한다.(현기현이친기친君子賢其賢而親其親) 일반 백성은 돌아가신 왕이 즐겁게 여긴 것을 즐기고, 돌아가신 왕이 이익으로 여긴 것을 이익으로 누린다.(락기락이이기리樂其樂而利其利) 그러므로 (군자나 소인 모두) 왕이 돌아가셨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선왕先王은 돌아가신 왕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중에서 성군聖君,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나라를 세운 문왕과 무왕을 말한다. 여기서 군자와 소인 모두 선왕을 잊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선왕은 군자와 소인의 욕구가 다른데 그것을 모두 모두 만족시켰기 때문에 모두 잊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군자는, 선왕이 현인을 제대로 알아보고 등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왕이 자신의 친족을 두텁게 대했기 때문에 잊지 못하고, 소인(일반 백성)은 선왕이 자기들을 즐겁고 안락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잊지 못한다.
여기서 해석을 잘 봐야 한다. 군자가 직접 선왕이 어질게 대한 사람을 군자도 어질게 대하고, 친하게 대한 사람을 친하게 대한다는 것인지, 선왕이 어질게 대한 사람을 군자도 어진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선왕이 친하게 여긴 사람을 친하게 여길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앞에서 나는 후자로 해석했다. 왜냐하면 군자는 선왕과 같은 군주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소인이 선왕을 잊지 못하는 것이, 선왕이 즐긴 것을 즐기고 선왕이 이익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익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선왕이 소인을 즐겁게 해주고 이익을 준 것을 즐기고 누리기 때문에 잊지 못한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여기서는 후자가 더 유력하다.
군자현기현이친기친 君子賢其賢而親其親
소인락기락이이기리 小人樂其樂而利其利
이 두 문장에서 기현其賢, 기친其親 , 기락其樂, 기리其利,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