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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끼 Dec 21. 2021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과거의 나에게서 허접하고 어설픈 구석 중 하나는 단연코 '의사소통'이였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게 어렵다. 외향적인 성향이라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의사소통은 엄청난 집중도와 신중함을 필요로 해서 가끔 사람 만나는 게 피곤하고 두렵기도 하다. 잘 '들어야' 잘 말하는 데 넘쳐나는 단어들 속에서 진짜 상대를 찾아 듣는 건 꽤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나이가 들수록 모임의 종류가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잦아지는 반면, 나의 에너지는 한정됐다는 걸 깨닫고 언제부터인가 모임과 자리를 적절히 정리하게 되었다. 특히 부서지는 단어들로 가득 찬 대화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피했다. 대화자의 주체는 없는 껍데기로만 이루어진 대화들.


 한 때 팀을 꾸려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인터뷰 주제는 ‘우리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화두로 평범한 듯 비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었다. 두세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고 돌아와 글을 정리하면 녹초가 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압축된 그이의 인생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들을 수 없었기에 온감각을 세워 시를 접하는 것 같은 자세였달까. 그럼에도 그들의 진득한 엑기스같은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은 되레 빛나는 별들을 헤아리며 오는 것이였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상대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점점 1 대 다수보단 1 대 1의 자리를 조금 더 선호하게 되었다.


대화 중인가요?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말'을 하지만 사실 의사소통의 93%가 언어나 문자가 아닌 동작, 접촉, 준 언어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 이뤄진다. 눈빛이나 몸짓이 전달하는 것이 훨씬 많다. 코로나로 대면의 기회가 적은 시기에 언어를 습득한 아이들의 언어 발달이 다소 늦다는 슬픈 증거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비대면이 활성화되었다 해도 방역수칙이 완화됨과 동시에 상대와 마주보고 같은 공기 속에서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때때로 대면하고 이야기하면 매끄럽게 흘러갈 상황들이 sns에 문자로 담기면서 예기치 못한 오해를 낳는다. 더군다나 인간의 의사소통은 직접적인 듯 직접적이지 않아 매 순간 어렵다. 상대의 문장 속에서 맥락과 뉘앙스를 읽고 그 문장들이 담겨있는 전체적인 공기를 읽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between the line'. 행간을 읽어라. 그래서 짧은 대화에서도 머릿속은 끊임없이 굴러간다. '상대가 저 말을 하는 의도는 무얼까?' '나는 이렇게 말해도 될까?' 배려와 공감을 흔히들 마음으로 한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는 머리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대화에선 심장만큼 두뇌도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물론 간혹 저런 과정 없이 생각하는 대로 내뱉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노력들이 매분 매초 음성언어, 비음성언어와 함께 춤추고 있는 것이 ‘소통’의 장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이 ‘말’의 부재로 인해 답답할 때도 있다. 나는 종종 앱스토어에 있는 새로 나온 어플들을 이것저것 사용해보곤 하는데, ‘고양이 번역기’라는 놀라운 어플이 새로 나왔다. 이전에도 푸코와 두부에게 써보려고 강아지, 고양이 번역기들을 시도했었으나 번번이 터무니없는 인간 말을 보여주었기에 큰 기대감은 없었다. 그러나 새 어플의 리뷰가 나름 괜찮아서 반신반의하며 설치를 하고 두부에게 들이댔다. ‘두부야~, 냐옹해봐~’ 조용한 두부가 소리 내기만을 기다리며 졸졸 쫓아다녔다. 때마침 식사시간이 되어 사료 그릇을 집어 드니 두부가 울기 시작했다.

‘냐~~아아아아아~~ 옹’

그것은 울음이라기보다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리고 번역기 화면에는 ‘당신을 믿고 사랑해요.’라는 얼토당토않는 문장이 떴다. ‘밥 준다고 사랑한다는 건 아니겠지.’ 하며 한-영 번역기도 가끔 오역이 난무한데, 이종 간의 언어를 번역한다는 게 말이 되나 하며 어플을 삭제했다.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새로운 개, 고양이 번역기가 나올 때마다 설치해보는 건 녀석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고픈 반려인의 애잔한 몸부림이다.


 푸코나 두부가 무언가 불편해 보일 때, 어딘가 아픈 것 같을 때 인간의 언어로 ‘말’해줄 수 있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푸코의 눈 질환이 녹내장임을 알아내기까지 네 군데의 병원을 거쳐야 했다. 처음 작은 동네병원을 시작으로 서울의 대학병원, 부산의 유명한 안과 전문병원, 부산 선생님의 제자가 운영하는 분당 병원까지 이곳저곳을 돌아 마침내 푸코의 동공이 커지고 뿌예진 상황을 정확히 알아냈다. '나 안압이 올라가서 눈도 아프고, 두통도 심해.'라고 얘기했다면 처음에 단순히 결막염 안약을 처방받지 않았을 텐데. 골든타임을 놓친 것 같아 속상했고, 첫 번째로 다녀온 병원을 무지하게 원망했다.


녹내장 시술 후. 따뜻한 선생님과 병원을 만나 지금은 건강해졌다.



 말이 통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으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기에 나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푸코를 관찰하고 예민하게 살핀다. 푸코의 행동을 살피고 동공의 탁도를 유심히 지켜본다. 푸코가 조금이라도 눈을 깜빡이면 녀석의 눈꺼풀에 살짝 손을 얹어 불편한 지 확인한다. 간단하고 효율적인 음성언어가 없는 관계에선 음성언어를 통한 대화 이상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도리어 종종 언어를 통한 소통에서 오해가 싹트기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같은 인간들끼리도 ‘으, 진짜 말이 안 통한다.’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결국 말로 통하든 행동으로 통하든 모든 의사소통의 과정은 지속적인 관찰과 시간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두부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리고 두부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충분한 시간이 쌓이지 않았던 것 때문이라고 추측해본다. 푸코가 배고픈지, 똥이 마려운지, 눈이 불편한지를 그 어떠한 음성언어의 교환 없이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5년 X 365일이라는 사례들이 알려준 데이터 값 덕분이다. 두부와는 점점 그 데이터 값과 사례를 공유하고 있다. 더 이상 두부는 새벽 4시에 배고프다며 반려인을 깨우지 않고, 나는 어느새 두부의 '냐옹~'과 '냐아아아~옹'과 '냥!'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두부는 어렵다. 푸코와 나란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푸코 콧등을 휙 할퀴고 도망간다. 아직은 두부와 소통하기 위한 채널이 더 필요한 듯싶다.


어느덧 붕어빵과 호떡이 생각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며칠 전 초록 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에 서있었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노릇한 붕어빵 냄새가 흘러나오기에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

네 명의 농인들이 신나게 수어와 몸짓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붕어빵 노점 주인분은 농인이셨고, 붕어빵을 사러 온 그의 지인들과 함께 대화의 장이 펼쳐진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요란한 대화였다. 비 농인인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들의 언어로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모습. 그들처럼 두부나 푸코나 말(음성) 없이도 나에게 그들만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선 예민한 관찰력과 시도하려는 애정이 필요하다.

'음성언어는 가장 나약하다.’라는 제야의 말이 떠오르며, 저 자신만 옳다며 남들에게 칼이 되는 말들이 만연한 요즘. 가끔은 음소거한 채 눈빛으로만 우리의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메리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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